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
비어시바 메이월드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마지막 남은 주황빛 햇살도 어마어마한 잿빛 구름 뒤로 사라졌다. 차디찬 바람이 몰아치고 비가 내리자 우리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거세지는 파도에 우리가 타고 있는 작은 배가 요동했다. 어둠 속에서 선원들은 사력을 다해 해변으로 항해했다. 계속 배를 때리는 파도에 정신없는 젊은 여행자 20명은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몇 주 전만 해도 우리는 팔라완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기분이 들떠 있었다. 필리핀에서 제법 큰 섬인 팔라완은 백사장과 쪽빛 바닷물이 펼쳐진 지상낙원이고 꿈의 여행지로 손꼽힌다.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멋진 곳이다. 우리는 경비를 모은 뒤 부푼 가슴을 안고 기도하면서 여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 석회암 절벽을 바라거나 옥빛 석호에서 스노클링을 하기는커녕 태풍을 만난 것이다. 태풍 파올로는 거의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그런 중에도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안을 찾는 사람, 실망에 빠져 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 사건 뒤 몇 주가 지났다. 타알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지역 봉사단 ‘GROW’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내려놓음’이라는 수련회 주제가 눈에 띄었다. 삶의 대부분을 조직과 계획을 통해 관리하는 청년 전문가들이 모여 내려놓음에 관하여 배우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내려놓음이 왜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고 그들과 내려놓음의 여정에 함께했다.
아무튼 팔라완 여행은 환상적인 경험과 교훈으로 가득했던 여행이다. 내려놓음을 배웠던 여행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타이어가 펑크 나고, 도로에서 세 시간 동안 꼼짝달싹 못하고, 하늘에서 비가 계속 내리고,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쳤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두컴컴해지는 하늘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평안을 경험하고, 한 줄기 황금빛 햇살에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태풍이 희망찬 우리의 꿈을 꺾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흔들 수는 없었다. 우리는 기도하고 웃고 떠들며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에게 힘을 주었다. 단단한 유대감과 새로운 지원 체계가 만들어졌다. 뒤돌아보면, 내려놓은 상태에서만 폭풍우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내려놓을 때 혼란 속에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내려놓을 때 희망, 평안, 기쁨이 있었다.
우리는 즐겨 내려놓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도 즐겨 내려놓지 않는다. 많은 것을 해내지만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만 산다. 다윗의 삶을 보면 내려놓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 왕 다윗은 어렵지 않게 사울을 거꾸러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를 기다렸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었다. 다윗 왕은 자신을 내려놓고 잠자코 하나님을 기다렸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내려놓으면 어떤 일이 생겨도 마음이 평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었다.
시편은 말한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이 말씀에 나 자신을 내려놓는다.
비어시바 메이월드 인도 타밀나두 출신으로 필리핀 재림교회 국제대학원(AIIAS)에서 신약 종교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