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바꿈
거쳐야 할 과정
지난해 전 세계에서 자신의 외모를 완전히 바꿔야겠다고 느낀 사람이 2,300만에 달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그들은 주름 제거, 쌍꺼풀 수술, 지방흡입술, 복부를 평평하게 하는 복부성형수술을 받았다.1 이는 타이완이나 카메룬의 인구와 맞먹는 숫자다. 미국에서만 미용·화장품 시장 규모가 620억 달러를 넘어섰다.2 매년 1인당 191달러를 소비한 셈인데 전 세계 여러 곳에서 191달러에 구입할 수 있는 물품들을 생각해 본다면 상당한 액수다. 2020년까지 전 세계 미용·화장품 시장은 6,75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3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타락 이후로 인류는 변화를 갈망해 왔다. 어쩌면 잃어버린 에덴을 향한 그리움이거나 인간이 단순히 일하고 먹고 잠자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창세기 11장은 미래를 손에 넣기 위해 탑을 쌓았던 이름 모를 무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도시,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 자신의 명성이 변화의 재료이다. 나중에 강력한 지도자들은 이웃 나라를 정복하고 제국을 세워 세상을 변화시켰다. 통제와 권력이 변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통용되었다. 알렉산더, 한니발, 칭기즈칸, 나폴레옹, 스탈린, 히틀러는 옛것을 정복하고 파괴하여 완전히 새로운 것을 세우고자 했고 그것이 천년만년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들 모두가 실패했다.
다른 방법
공산주의는 붕괴했다. 독일의 파시즘도 무너졌다. 지금도 세상은 앞을 다투어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려는 또 다른 ‘~주의(ism)’들 때문에 휘청거리고 있다. 그러나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께서는 변화를 위해 다른 길을 택하셨다. 그분께서는 권력 게임에 손을 내민 적이 없었다. 통제를 바라시지도 않았다. 사실 그분은 자발적으로 자기를 비워 우리의 처지를 겪으셨다(빌 2:6~8). 변화를 향한 그분의 길은 예루살렘 성 밖에 세워진 거친 십자가로 줄곧 향했다. 그 길을 가면서 그분은 나환자를 만지고 죄인을 껴안으셨다. 몸이 아픈 사람, 마음이 상한 사람을 고치셨다. 가장 무더운 한낮에 우물에서, 병 낫고 싶은 사람이 몰려 있는 샘 곁에서, 팔레스타인에 종횡으로 뻗어 있는 대로와 골목에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그들이 머물고 있는 현장에서 만나셨다. 비교적 짧았던 예수님의 사역은 세상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분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이야기 듣는 사람들은 창조주와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분이 하늘 아버지를 소개하면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흥분했다. 예수님은 귀담아듣고 이해하시는 분이라고 그들은 느꼈다.
그분의 말과 행동이 암시하는 것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 대부분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한 것이다(시 118:26; 마 21:1~10). 예수님의 급진적인 비전이 실현되려면 왕이 되셔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고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여정에 들어선 그분을 왕처럼 환대했다.
이 왕국을 위한 결정적 전투가 십자가에서 그리고 또다시 마음의 전쟁터에서 벌어질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흥분은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다. ‘소리 높여 호산나’를 외치던 이들은 유다의 배반, 산헤드린 협잡꾼들의 부당하고 불법적인 유죄 판결 이후 고문받고 얻어맞은 예수를 빌라도가 보여 주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그런 왕을 원하지 않았다. 의기양양한 흥겨움은 살인적인 광분으로 변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3년 이상 끊임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까이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지켜보았음에도 한 사람은 그분을 팔아 버렸고, 또 한 사람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대부분은 도망쳤고 너무나 두려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그분이 말씀하신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십자가에서
이방인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갔다(마 27:32). 병사들이 거친 기둥에 예수님을 못 박았고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가운데 고난 당하셨다. 이것은 공교한 쇼가 아니었다. 하나님이며 인간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지고 죄의 파괴적인 성질로 고통 받으면서 ‘이걸로 끝장’이라는 사탄의 음흉한 속삭임을 들으셨다. “사탄은 맹렬한 유혹으로 예수의 가슴을 쥐어짰다.”고 엘렌 화잇은 진술한다. “구주께서는 무덤의 문을 꿰뚫어 보실 수 없었다. 정복자로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그 희생을 인정하신다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나님께 죄는 너무나 역겨운 것이므로 그는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4
어둠이 해를 덮었고 십자가 밑에 모인 사람들은 비탄에 잠긴 예수님의 절규를 들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침묵이 흘렀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자비는?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붙들고 계셨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인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우리에게 창조 이전의 계획을 상기시켜 준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신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의 기초를 놓으시기 오래전부터 우리를 마음에 두시고 사랑의 중심으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 온전하고 거룩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라고 에베소서 1장 4~5절을 풀어 주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로 맞아들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지구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그 순간에 두 사람이 예수님 편에 굳게 섰다고 알려준다. 죽어 가는 범죄자를 공식적으로 편드는 것인데도 말이다. 유대인 부자이자 예수님의 비밀 제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 무덤을 제공했다. 또 한 사람은 야음을 틈타 예수님을 찾아간 적이 있는 니고데모이다(요 19:38~42). 두 사람 모두 큰 날인 안식일을 예비하는 날에 의식적 부정을 개의치 않고 예수의 시신을 거두었다. 둘 다 자신의 최선, 즉 무덤 그리고 왕에게 걸맞는 값비싼 몰약과 침향 100근을 드렸다.
새로운 무언가의 시작
그 안식일에 예수의 추종자들은 분명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모든 기대가 무너졌으며 모든 꿈이 깨졌다. 예수님은 로마 군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무덤에 누워 계셨다.
그 안식일에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비탄에 잠겼고 세상이 영원히 변할 것을 깨닫지 못했다. 큰 지진과 함께 천사가 내려와 무덤 입구를 덮고 있는 돌을 굴렸다. 예수께서 일요일 아침 일찍 무덤에서 일어나시자 군사들은 두려워 떨며 쓰러졌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는 천지 만물이 고개를 숙이고 큰 소리로 요동한다. 빈 무덤을 발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된 이들은 맥없이 다락방에 있던 무리에게 소식을 전했다. 주님이 살아 계신다! 서서히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희망이 싹트면서 실망과 두려움을 집어삼킨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세상에 일으킨 변화를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십자가의 어둠은 부활의 빛이 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낙담에 빠진 제자들이 용감하게 예수님의 부활과 구원을 선포하는 자가 되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을 위해 삶을 불태우는 사람들의 연대기이다. 죄책감은 용서로 감싸졌고 사망은 그 쏘는 것을 잃었다(고전 15:54~55). 공허했던 마음에 뜨거움이 가득 찼다(눅 24:32).
이 모든 사건의 한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는 제자들 사이에 어느새 그분이 서 계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부드럽게 인사를 건네시면서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 20:27). 믿으라. 믿기만 하라!
큰 물고기 153마리
예수님의 부활 뒤에 물고기 사건이 일어났다(요 21장).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과 다른 두 제자가 물고기를 잡으러 다시 갈릴리로 나갔다. 큰 문제를 겪을 때 사람들은 으레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알고 있는 곳으로, 익숙한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긴 밤을 지새웠지만 그들은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문득 해변에서 혼자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낯선 사람에게 ‘얘들아’라는 친밀하고 애정 어린 표현을 사용하는 자는 누구일까?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5~6). 그 즉시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베드로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해변으로 다가갔다.
나머지 제자들은 열심히 그물을 해안으로 옮겼다. 요한은 그날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았다고 기록했다(11절). 누군가 물고기 숫자를 세어 보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따뜻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다. 빵과 생선을 그들과 함께 드시고 나서 베드로의 눈을 쳐다보며 진심 어린 질문을 던지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15절). 그걸 질문이라고 하시나? 예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주변 동료들의 사랑과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셨고 세 번 모두 긍정적인 대답을 들으셨다. 나는 세 번째 대답이 가장 마음에 든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1절). ‘하나님, 어떻게 제가 하나님 앞에서 연기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제 마음을 아시고, 저의 지난날, 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데요.’
변화된 움직임
예수님을 만난 뒤 베드로는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움직였다. 교육받지 못한 적은 무리가 성령 충만함으로 권능을 입고 용감하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전했다. 그 수는 점점 늘어났고 그들은 은혜 안에 교제를 나누며 점점 성장했다(행 2:42~47; 4:32~33). 변화된 성장에는 새로운 신학적 문제가 수반됐다. 여전히 베드로와 초기 유대 신자들은 거대한 신학적 장벽을 뛰어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언약의 백성으로 초대하여 길의 일부가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행 9:2; 19:9, 23; 22:4) 이방인도 자기 제자로 부르셨다는 말인가?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경험한 사건은 생각의 변화를 이끄는 단초로 작용했다(행 10장). 하나님의 은혜는 총괄적이다. 구주께서는 인종, 종파에 관계없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성령의 활약은 국경에 제한받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마음속에 그어 놓고 나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경계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도.
부활의 아침은 침체보다 변화를 중시하는 운동의 서막일 뿐이었다. 그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셔서 그 운동의 일부가 되게 하신다. 그분이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다시 오셔서 우리를 본향으로 데려가신다고 분명히 알려 주는 운동이다. 우리는 바라보고 기다리며, 기다리면서 변화된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극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되어야 할 존재가 된다. 여전히 길을 찾고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복의 존재가 된다.
1국제미용성형수술협회가 제공한 최근 통계 수치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할 것. http://www.isaps.org/wp-content/uproads/2017/10/GlobalStatics.WorldWide.Summary2016s-1.pdf
2http://www.prnewswire.com/news-releases/marketresearchcom-the-us-beauty-and-cosmetics-market-expected-to-exceed-62-billion-in-2016-300209081.html.
3Http://www.businesswire.com/news/home/20150727005524/en/Research-Markets-Global-Cosmetics-Market-2015-2020-Market
4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753
제럴드 A. 클링베일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며 더 변화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십자가의 어둠은 부활의 빛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