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면역 요법
죄를 이기는 신성한 해독제
수년 동안 나는 한 가지 중독에 빠져 있었다. 그건 바로 무분별하고 지속적인 TV 시청이었다. TV가 켜져 있으면 어김없이 그것에 몰입했다. 숱한 시간을 나태하게 허비했고 얻은 유익은 거의 없었다.
수년 전이다. 학교에서 귀가한 어린 자녀들이 소파에 누워 기본 채널만 제공하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아이들도 나처럼 될 것 같았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그날 밤 TV를 치웠다. 아이들은 TV가 없는 환경에 잘 적응했고 방과 후에 숙제도 더욱 성실히 해냈다. 우리 가족은 꾸준히 함께 저녁 예배도 드리게 되었다.
출장이 잦아지자 TV의 유혹은 더욱 교묘했다. 호텔 객실 대부분에는 무한정 채널을 제공하는 더 큰 TV가 있었다. HD TV도 곧 등장했다. 그것이 내 약점이라는 사실을 원수는 알고 있었다. 기존의 TV도 괜찮은데 새로운 유혹거리를 또 만들어 내다니! 금주에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이 경험하듯 유혹은 수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날 TV는 훨씬 정교한 테크놀로지에 밀려 그 명성을 잃었다. 소셜 미디어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일종의 예술 행위가 되어 버렸다. 유튜브 동영상에 몰두하거나 시간마다 트위터를 보면서 살짝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우리는 합리화한다.
나에게 이것은 투쟁이었다.
독자들의 문제는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런데 TV와 싸우는 게 안식일 쉼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생각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다.
TV에 빠져 있던 수년 동안 안식일은 나에게 방어벽이 되어 주었다. 제칠일을 거룩하고 신실하게 지키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덕분에, 패배감으로 가장 절망적이었던 때에도 나는 안식일을 기다렸다. 금요일 밤과 이후 24시간 동안은 TV를 켜지 않았다. 나에게 안식일은 어둠에서 벗어나는 해독제였다.
이 얼마나 즐거운 변화인가! 안식일에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할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선물인 시간을 잘못 사용한 데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이 여전히 가능했다. TV를 보면서 세속주의, 판타지, 무의미를 꾸역꾸역 섭취하는 일을 중단하고 드디어 정말로 중요한 것에 기대어 쉼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변덕스러운 나에게 관심을 갖는 하나님이야말로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다(출 20:8). 안식일은 자기 탄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신 5:12~15).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위해 안식일을 제정하셨다(막 2:27). 지구는 우리를 위해 지어졌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설계되었다. 안식일은 우리를 위해 제정된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심장 박동과 호흡에 매 순간을 의존하듯 우리는 안식일에 의존한다.
안식일의 창세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안식일을 생각해 내셨을까? 창세기에 따르면, 여섯째 날인 금요일에 그분께서는 창조를 마치셨다 (창 1:31~2:1).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물은 아담과 하와(창 1:26~27)였는데 그들을 위해 그분께서는 같은 주에 다른 모든 것을 이미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형상대로, 영적인 존재로, 선택할 능력을 완전히 갖춘 존재로 만드셨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창조된 이후 첫 24시간을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 보내며 자신들의 창조주와 교제했다.
아담, 하와, 하나님. 이 얼마나 멋진 출발인가! 창조주이신 예수님과 직접 교제하며 배우는 기쁨으로 들떠 있는 아담과 하와를 상상해 볼 수 있겠다(골 2:13~17). 토요일 일몰이 다가오자, 하나님의 아들은 그들에게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을 제안하셨다. ‘다음 주에도 같은 날 함께하면 어떨까?’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 그랬다. 하나님은 초대하시고 우리는 기쁨을 누린다.
안식일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안식일은 유대인의 발명품이 아니다. 주 중에 하루 쉬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 바쁜 포스트모던 세대의 발명품도 아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필요를 위한 하나님의 작품(창 2:1~3)이다. 너무나 근본적인 것이라 하나님은 그것을 넷째 계명에 영원히 새겨 놓으셨다(출 20:8~11).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 안에 쉬면서 일상의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안식일은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샤바트(Shabbat)’이다. 그것은 ‘쉰다’는 뜻만이 아니라 ‘중단한다’는 뜻도 있다. 피곤하지 않아도 혹은 일요일부터 유익하고 좋은 일만 계속해 왔다고 해도 매주 중요한 영적 충전을 위해 금요일 일몰이 오면 우리의 일과를 중단해야 한다(레 23:32).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음악과 같다. 우리의 영혼을 끌어올리는 음악, 세상에서 다른 방법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에 귀 기울이게 하는 음악이다.
아내와 함께 북미에서 북아시아로 처음 이주한 뒤 도쿄, 서울, 홍콩 같은 대도시의 지하철, 기차, 거리의 엄청난 인파에 압도되었다. 인간에게 내면의 평안이 절실하다는 것을 거기서 분명하게 느꼈다. 시선은 서로를 향하지 않는다. 대부분 눈은 스마트폰에 고정되어 있다. 삶은 발생하는 것일 뿐 영위되지 못한다. 이 수백만 명 가운데 사랑의 하나님, 우주의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고 가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의 안식일은 그 해결책의 하나다. 바쁜 일상의 해독제이다. “너희가 가만히 있어(문자 그대로, ‘내려놓고, 중단하고’)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시편 기자는 외쳤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라고 또 다른 기자는 기록했다.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들을 즐기는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인식하면서도 왜 우리는 매일매일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하는가? 여러분과 나는 쉴 수 있다. 몸부림을 중단하고 안식일을 안식일답게 거룩한 날로 보낸다면 그 쉼을 얻게 될 것이다(히 4:4~9).
론 E. M. 클루제 북아태지회 목회부장이며 대한민국 일산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