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세상에서 희망을 찾다
5인의 여행기
사람의 마음과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해변의 모래알이나 바다의 물방울보다 많고 헤아릴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그분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외친다.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분께서는 인간의 틀을 뛰어넘어 전적으로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 무엇보다 그분이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신 사랑, 동정, 인내 그리고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기 위해 가신 먼 길을 보면서 우리는 그토록 자애로우신 하나님께 경이를 느낀다.
여기, 고달픈 세상에서 희망을 찾아 나선 뒤 마침내 예수를 만난 다섯 명을 소개한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새삼 확인하기 바란다. – 편집실
영화를 보고 나서 예수님을 찾았다
24세인 나탈리아 타타르추흐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공부한다. 그녀의 취미는 스쿼시, 음악 감상, 영화 감상이다. 2년 전만 해도 그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바꾼 것은 멜 깁슨의 영화 ‘핵소 고지’이다.
나탈리아는 매우 솔직한 사람이다. ‘핵소 고지’를 보면서 무엇보다 맘에 든 부분은 특수효과였다. 데스몬드 도스의 이야기가 감동적인 것은 물론이다.
“저는 남다른 사람을 존경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까칠한 사람 취급 받는 자신이 어느 정도 도스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여긴다.
교파가 달랐던 나탈리아는 오스카상 수상작인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도스나 재림교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재림교인’이라는 말을 영화에서 처음 들었어요. 영화 본 뒤 확인해 보려고 그 명칭을 여러 번 읊어 봤어요.”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 지역 재림교회 목사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나탈리아는 모임에 초대받았다. 알고 보니 성경 연구 모임이었다.
나탈리아는 개인의 신념과 종교적 관습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재림교인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뒤 한동안 제 삶에서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탈리아가 회상했다.
“저를 따뜻하게 맞아 준 재림교인에게 새로운 지식을 얻고 있었지요. 처음 재림교회에 갔던 때가 기억나네요. 언제 고개를 숙여야 할지, 언제 일어서야 할지도 모른 채 맨 첫 줄에 앉아서 얼마나 어색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교인들이 저를 안아 주고 무척 사랑해 주셨어요!”
나탈리아는 2018년 1월 27일에 침례를 받았다.
나탈리아는 보통의 대학생보다 힘든 문제를 안고 있다. “18년 동안 간질로 고생했어요. 하지만 그 때문에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죠. 저는 아직도 이 병을 이해할 수 없어요. 여전히 이 병과 씨름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병 덕분에 더 강해졌어요. 저를 아낌없이 후원해 주시는 부모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서 강해져야 했던 적이 참 많아요. 병원에 있을 때 부모님은 눈물을 감추고 제 곁에 함께 계셨어요. 제가 인생을 뒤집는 결정을 내렸어도 그분들은 여전히 저에게 힘이 되어 주고 계셔요.”
폴란드의 재림 청년들은 데스몬드의 이야기 ‘핵소 고지’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페이스북에 도스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올리거나 티셔츠에 ‘데스몬드는 75명을 구했고 예수는 모든 사람을 구했다.’는 문구를 넣는 식으로 다양하게 재림교회를 소개하고 있다.
나탈리아는 스스로를 구원받은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다.
나탈리아의 회심을 다룬 단편 다큐멘터리를 다음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youtu.be/GOQs2KegwkI
마레크 라코프스키 바르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폴란드연합회 총무이다.
댄스 클럽 DJ에서 전도유망한 설교자로
자메이카 속어로 ‘버스 탄다’는 말은 클럽 음악계의 연예인이 된다는 뜻이다.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이것은 가난에서 벗어나 부와 명성을 얻는 길로 통한다. 화려함의 이면에는 마약, 폭력, 난잡한 생활이 뒤따를 때가 많다.
‘블링’으로 알려진 20세의 리카르도 맥칼라는 자메이카 포틀랜드의 시골 마을 스키보에서 떠오르는 댄스 클럽 스타였다.
문맹률과 실업률이 높은 스키보에서는 이렇다 할 인재가 배출되지 못했기에 이 신예 연예인을 자랑스러워했다. 2002년, 그는 과감하게 활동 영역을 전환하여 첫 앨범을 녹음하기로 했다. 월요일 녹음에 앞서 토요일 밤에 그는 혼신을 다해 무대 공연을 마쳤다.
맥칼라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람이 있다. 바로 재림교인인 그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맥칼라의 방탕한 생활에 대해 경고하면서 교회에 다니라고 권했다. 그는 침례를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머니의 감화 덕분에 자신에게도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토요일 밤 무대 공연을 마치고 술을 마신 뒤 침대에 쓰러졌다. 일요일 아침에 깨어나 숙취로 심하게 구토하다가 우연히 어머니의 기도를 들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제게 주셨지만 저는 감당이 안 됩니다. 그만 데려가 주세요, 예수님.”
아들을 죽게 해 달라는 어머니의 기도에 맥칼라는 화가 났고 불안했다. 그때 갑자기 밝은 빛이 자신을 둘러싸는 모습을 보았다. 깜짝 놀랐다. 그 빛이 멀어지기 시작하자 성령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는 것 같아 공포를 느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 순간 제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생결단과도 같았죠.”
때마침 스키보 재림교회는 전도회를 개최하고 있었고 그 일요일 아침 강가에서 침례식을 거행할 예정이었다. 맥칼라는 어머니에게 알리지도 않고 교회에 가서 침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담임목사는 교회 교리를 알려 주고 그와 함께 기도했다. 그날 아침 맥칼라는 침례를 받았다.
전날 밤만 해도 무대에서 화려한 공연을 펼친 그가 그리스도께 굴복했다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침례식 장소로 모여들었다. 누구보다 놀란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셨는데, 하나님께서 마침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면서 무척 기뻐하셨어요.”라고 맥칼라는 말했다.
침례 후 맥칼라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글 읽는 법도 배웠고 지역 교회에서 앞장서서 활동하고 결혼도 했다.
현재 맥칼라와 아내 누비아에게는 세 자녀가 있다. 노던캐리비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중이며 2020년에 졸업할 예정이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제 삶을 변화시킨 일을 생각하면, 복음 전하는 일을 결코 부끄럽게 여길 수가 없어요!”
로리 헨리 미디어 작가이자 프로듀서이며 자메이카 노던캐리비언대학의 언론정보학과 조교수이다.
논리와 믿음으로
그날 나는 부모님과 드라이브하기로 되어 있었다. 부모님은 특별한 보상으로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함께 새 차를 시승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자 극심한 공포가 느껴졌다. ‘넌 오늘 부모님과 차를 타면 안 된다.’ 결국 나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며 학교에서 내렸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경고의 메시지였다. 거대한 트럭이 부모님의 차를 들이받았고 뒷좌석 전체가 처참하게 뭉그러졌다. 그 충격에 차는 10미터 아래 협곡으로 굴러떨어졌다. 다행히 부모님은 목숨을 건지고 회복되셨다. 내가 그 차를 탔다면 아마 나는 죽었을 것이다.
나는 신앙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도덕적인 소양을 배웠지만 부모님의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종교는 없었다. 종교는 사랑의 원천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고 학대의 또 다른 모습으로 여겨졌다.
자동차 사고가 났을 당시 나는 10살이었다. 나에게 주의를 주고 나를 인도하고 보호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할머니는 오래된 흠정역 성경을 나에게 주셨는데 나는 평범한 책처럼 그 책을 읽으려고 애쓰다가 이내 서랍장 맨 아래 서랍에 숨겨 버렸다. 하지만 성경을 꼭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성경은 신성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인생의 분수령이 찾아왔다. 갑자기 다른 종교들을 접하게 된 것이다. 미생물학과 음악을 배우면서 전부 A학점을 받았지만 과학 이론에서 발견되는 모순으로 고민하기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나는 교회에서 오보에를 연주했다.
교회에서는 가서 연주하고 사례금을 받고 오면 그만이다. 고용된 도우미로 찾아온 음악가에게 전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교인은 거의 없었다.
마침내 재림교회에서도 연주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인간은 틀릴 수 있으니까), 참된 빛에 반대되는 모든 것은 검증해 보라는 설교가 마음에 다가왔다. 게다가 교인들이 너무나 친절했다. 처음으로 점심 포트럭에 초대를 받았다.
나는 목사님의 아들과 친해졌고 성경과 종교, 진리에 관하여 긴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려운 질문들을 던졌고 논리와 이성에 근거한 답변들을 들었다. 그 뒤 대학원 공부를 위해 메릴랜드로 가서 실버스프링에 있는 스펜서빌 재림교회에서 목사님에게 침례를 받았다.
나는 종교를 고통이자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던 사람이다. 내게는 진부한 이야기 이상이 필요했다. 비평적인 분석에 대응할 수 있고, 과학에 필적하며, 나의 인도자이자 평생의 보호자이신 분의 사랑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견실한 토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이미 진 슈나이더 돔 미국 버지니아에 살고 있다.
부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나는 유교 사상과 불교 신앙을 따르는 가정에서 자랐다. 기독교 대학에 입학해서야 교회 문화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훗날 나의 아내가 된 조명애를 만났다. 그는 신실한 재림교인이었다.
성경상의 안식일인 토요일마다 함께 교회에 출석하면서 진정한 예배를 경험하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1981년에 결혼했는데 부모님이 우리 종교를 완강하게 반대하셨다. 갈등이 너무 심해져서 아내에게 교회에 다니지 말자고 설득했다. 때맞춰 우리는 부모님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고 아내는 다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나는 부모님의 신앙을 따랐다.
둘째 아들이 태어날 때 아내가 심하게 아파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재림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이 아내 곁에서 기도해 주셨다. 그분들의 진심 어린 기도와 사랑, 관심을 잊지 못할 것이다.
기도의 능력 덕분에 아내는 회복했고 아들 역시 건강하게 태어났다. 재림교회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지만 내 믿음은 아직도 연약했다.
결혼 10년째가 되자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교회에 다녔다. 첫째 딸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토요일 안식일을 준수한다는 이유로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스트레스를 받아 성적도 떨어졌다.
아내는 딸아이를 삼육학교에 보내자고 제안했다. 먼 거리를 통학해야 했지만 이내 딸에게서 변화가 나타났다. 성적이 올랐고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했다. 나는 교회와 학교를 호의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 직장에서 위기와 갈등을 겪으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아내가 목사님과 성경 공부를 시작해 보라고 권했다. 하나님에 관하여 더 많이 배웠고 성령께서 사랑과 평화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셨다. 나는 곧 딸아이와 함께 침례를 받고 재림교회에 입교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여정을 이끄셨고 절망적인 상황을 사용하여 그분을 알도록 더 큰 기회를 허락하셨다.
인생에는 숱한 도전이 끝없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건대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끊임없이 자기에게로 조금씩 더 가까이 이끄셨다. 그분은 여전히 나와 함께하신다.
최병관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 교문리교회 장로이다.
“죽어야 했던 나를
하나님이 살려 주셨어요.”
사크하일 응수말로
나는 조상신을 믿으며 자랐다. 말하자면 죽은 사람들을 숭배한 것이다. 그런 세계관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 산간 지방에서 살다가 요하네스버그 근처 도시로 이주했고 훨씬 기독교 중심적인 지역사회에서 일했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들어 대는, 무례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아프리카 전통 신앙을 따르는 우리를 죄인이라고 했고,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가 쓸모없는 존재라고 했다.
나는 기독교가 점점 더 가증스러웠다. 그런 기독교인들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어서 성경을 비판하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기독교인 동료를 만나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나 그들의 믿음을 깎아내리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래서 믿음을 저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이사야 8장 19~20절을 알려 주었다. 거기서 하나님은 나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 구절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기독교인에 대한 반발심은 여전했다.
나는 고압 전류를 다루는 전기 기술자이다. 어느 날 작업장에서 강한 전류에 감전되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누워 있는데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네 목숨을 구해 주었느냐?”
그런 고압에 감전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살았다. ‘분명히 죽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고 했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기적적으로 살려 주셨으니 이제부터는 그분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 순간 나는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나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다음 날부터 담배와 술에 관한 생각이 싹 사라졌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기 시작했다. 성경을 구입해서 읽고 기도도 하기 시작했다. 옛 친구들은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나는 특히 다니엘서에 관심이 생겼지만 설명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두 사람에게 나는 다니엘서에 관한 답을 얻도록 3일간 함께 금식하자고 제안했다. 한 달 뒤 한 형제가 TV에서 다니엘서 연구를 방영한다고 알려 주었다. 강사는 다니엘서 전체를 훑어 주었고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 사건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참고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도서관 여러 곳을 다녔고 다니엘서 연구에서 얻은 정보가 옳다는 걸 확인했다. 성경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내 믿음도 커졌다.
이 다니엘서 연구를 재림교회에서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다니던 교회에 계속 출석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은 다니엘서에 대해 설명하지 못할뿐더러 안식일이나 방언과 같은 성경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갈 길을 알려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증표를 보여 달라고 구했다. 성경대로 따르는 교회의 교인 두 사람이 나의 집을 방문해 그 교회를 소개해 주도록 해 달라고 말이다.
놀랍게도 주님께 간구한 대로 재림교인 마흘랑구 형제와 사바 자매가 찾아왔다. 기도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때부터 나는 재림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사크하일 응수말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헬더버그대학 신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