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스 파세그히, <애드벤티스트 월드>
살 사람은 누구이고
죽을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에 관하여
무인자동차가 알려 주는 것
악몽이 반복되고 있다.
인간은 쇠약해지고, 늙고, 병든다. 자율성을 잃는다.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이 결정을 내리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산다. 점점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느끼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사람들은 더 이상 대장 노릇 할 수 없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통제권을 상실할 때 불안한 떨림이 시작된다.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가 자가용을 운전할 때보다 더 신경이 곤두서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통계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차 안에서는 긴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무기력함을 느낀다.
윤리적 손잡이?
무인자동차 상용화의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전문가들은 무인자동차로 야기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충돌 사고에 직면한 무인자동차가 누구를 살릴 것인지 설정이 가능하다고 언론에 공개된 뒤부터 특히 그렇다.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위험을 만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무인자동차에서는 설정값이 미리 입력된 컴퓨터가 상황 대응을 담당한다. 이른바 “윤리적 손잡이”의 설정 여부에 따라 “상대방을 살리고 운전자가 희생당하거나…상대가 희생당하고 운전자가 살 수도 있다.”고 애버게일 비올은 <뉴 사이언티스트>*지에서 말했다.
‘중립 상태’로 설정된 차량 주행 스위치를 원하기만 하면 ‘완벽한 이타주의 모드(상대의 생명을 최우선시)’에서 ‘완벽한 이기주의 모드(자신의 생명을 최우선시)’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비올과 다른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가령 모두가 자기 보호 모드를 최고로 높여 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또는 “모두가 중립으로 설정해 놓으면 윤리적 손잡이는 있으나마나”라고 비올은 말한다. 상대방의 삶과 죽음에 대한 책임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자율성을 찾아서
성경은 인간의 자율성이 오래전에 상실되었다고 기록한다. 에덴 이후의 역사를 보면,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였던 인간이 선택의 자유를 포기하고 그들을 파괴하도록 세팅된 원수의 수중에 자신을 내맡겼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인류는 자율성을 빼앗겼다. 다른 누군가에게 결정권이 넘어갔고 인류 생존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러나 바로 그때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게 되었다(사 9:2).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신 것이다(갈 4:4~5).
멸망으로 향하는 우리를 ‘완벽한 이기주의’ 모드에서 구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완벽한 이타주의’ 모드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분의 결정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어느 유대인의 기도문에 따르면, “살 사람이 누구이고 죽을 사람이 누구인지가…[새해에] 기명되고 [대속죄일에] 인 쳐진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한다. 그분은 태어나셨고 완벽한 삶을 사셨고 죽임 당하고 부활하셨다. 중재자로 일하고 계시며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진정한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분조차 우리 대신 선택할 수 없다. 삶과 죽음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살려면 생명을 택할지니라”(신 30:19, 한글킹제임스).
*Abigail Beall, “Driverless Cars Could Let You Choose Who Survives in a Cr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