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믿음
실패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나에게 말해 주오
“켈시, 선교지 활동에 관하여 소개해 주시겠어요?”
그 말에 울컥 치솟는 감정들을 추스르며 애써 표정을 조절해야만 했다. ‘아기들은 죽어 나가고, 아이들은 버림받아 굶주림에 시달린다. …아무리 해도 끝이 안 보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거기다 선교사라는 역학 관계는 또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가.’
늘 쾌활한 결핵 환자가 떠올랐다. 장기 입원에 연고자 하나 없었지만 그녀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그녀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면 될 것 같았다.
“예, 좋아요.” 머뭇거리며 대답한 뒤 나는 파워포인트의 사진 자료들을 모았다.
‘그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떻게 하지?’ 나는 감정을 억눌렀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생각하자.’ 그때는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집에 와서 3주 동안 머물 때였다. 물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교회가 듣고 싶어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겨우겨우 발표를 마쳤고 사람들은 고맙다고 했다.
하나하나 가슴에
몇 달이 지났고 나는 영구 귀국했다. 완전히 무너진 채로 말이다.
안식일학교 순서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이야기를 해 달라고요? 저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답니다. 진짜 제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으실 거예요. 지금 제게 요청하신 게 무엇인지 알고나 계시는지.’
거기서 조산사들은 의료 장갑 운반용 종이 상자를 임시 관(棺)으로 삼아 아기의 시신을 안치했다. 슬퍼할 겨를 따위는 없다. 간질을 앓는 12살짜리 남자아이는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퇴원 후 보호의 손길 없이 거리로 내몰렸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아기를 키울 수 없는 미혼모도 있었다. 그녀가 매춘부라는 걸 1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시골에서 왔다는 그녀는 너무나 어렸다.
또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까? 굶주린 조카들이 있다고 가정부가 말했지만 재무가 분말 땅콩버터와 분유를 몰래 꺼내 주라고 하기 전까지 내가 아무것도 주지 않았던 일? 혈액 주머니와 주사용 호스 등 기본 의료품이 없어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일? 장기 선교사가 계획과 방안을 잔뜩 가져와서 추가적인 일까지 시작하려고 할 때 선교 팀이 얼마나 진이 빠지는지에 대해서?
함께 일하다 보면 부족한 것 투성이다. 운영 자금, 물자는 끝없이 필요하다. 게다가 선교사들 사이에는 유감스럽게도 불협화음이 생기고 관계는 복잡하게 꼬인다. 선교 현장에서는 성격과 의견이 강한 이들이 한데 엉킨다.
그런데도 편안히 교회 의자에 앉아서 나에게 눈부신 선교 간증을 들려달라고? 아프리카에서 친구들이 다치고 굶어 죽는데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제대로 돕지도 못하고 있는데?
실패가 너무나 심각하고 광범위한데 교회는 선교를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로서는 못할 일이었다. 절실한 상황 앞에서 그토록 무력해진 적이 없었는데 간증이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 몇 년 동안 나는 몸부림쳤다. 돈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기 위해 애썼고, 수세식 변기의 자동 밸브가 작동하지 않으면 당연히 짜증을 내는 나 자신이 종종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버렸다. 건강이 나빠져 선교지로 다시 가기 어렵게 됐고 부모님은 이혼했고 친한 친구들이 죽었다. 웬일인지 아프리카에서 내가 느꼈던 결핍의 공허함이 내 가슴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슬픔, 건강 악화, 고통, 좌절이라는 무게에 눌려 나 자신은 가라앉고 있는데도 세상은 내가 느끼는 결핍에 대해 부요하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였다.
가장 귀한 이야기 들려주오
어느 안식일,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설교를 듣고 나서 차를 몰고 집으로 가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화를 내고 소리쳤다. “하나님, 정말 저를 생각하신다면 오늘밤 저를 꼭 껴안아 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주시란 말이에요.”
잠깐, 내가 지금 뭐라고 떠든 거야? 나는 깜짝 놀라 입을 닫았다. ‘하나님께, 우주의 왕이신 분께 이런 건방진 말을 하다니. 마태복음 4장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고 사탄이 꺼낸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잖아.’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날 오후 내 친구 샤마가 불쑥 나를 찾아왔다. 슬픔에 빠져 있는 나를 위해 1주일 내내 머물며 나를 꼭 끌어안아 주고 등을 토닥이고 집안일을 거들어 주었다. 내가 이야기를 쏟아내면 귀담아들어 주었다.
‘분이 나서 내뱉은 형편 없는 기도를 하나님은 왜 들어주셨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가슴에 담아 놓은 걸 다 쏟아낼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나중에 하나님은 다른 친구들, 다른 위로자들도 보내 주셨고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죽음과 상실로 슬퍼하는 것은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을. 절실한 물질적 후원 못지않게 이야기를 들어 주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간의 영혼은 망가져 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돕고 싶은 순간에도 혼란과 복잡한 문제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러한 불화와 부족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갈망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분은 자기를 붙잡으라고 나에게 명하신다. 그래서 내가 온전히 다른 사람들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도록.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그녀는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장막부흥회에서 맞이한 안식일에 로비에서 그녀가 말을 걸었다. 선교지에서 얼마 전에 돌아왔다고 했다.
“정말요?” 내가 물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겠군요? 정작 본인은 완전히 트라우마에 빠져 있을 텐데.”
“네, 맞아요!”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저도 아프리카에서 돌아왔을 때 그랬어요.” 내가 말을 거들었다. “사람들은 제가 겪은 일을 다 듣고 싶어 했지만 저는 선교지에 다녀와서 완전히 충격에 빠져 있었지요. 아무것도 해 줄 말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무얼 하고 온 것인가 싶었어요. 부족한 것 투성이인 곳에서 아무런 도움도 안 되었고, 잡다한 문제들에 엉켜 있었고.”
미소 짓는 그녀를 향해 내가 제안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이후 몇 시간 동안 그녀가 자기 이야기를 죽 털어놓았다. 나와는 다른 이야기였지만 주제는
동일했다. 무력감, 남을 사랑하고 섬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느낌, 극적인 스토리의 부재, 다른 선교사들과의 마찰 그리고 실패했다는 자괴감.
그때 문득 찬미가 가사가 떠올랐다.
나에게 들려주시오
예수님의 이야기
멸시 천대받으시고
고통 당하신 주님*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사셨다. 모범적인 사역이란 사랑과 섬김의 삶 속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 것이라고 나는 줄곧 생각해 왔다. 물론 사랑은 마침내 승리한다. 그런데 완전한 일조차 실패처럼 보일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진정한 성공이 때때로 명백한 실패를 의미할 때는?
나는 상상해 보았다. 사촌이 감옥에서 사형당했을 때 그리고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도 비수처럼 꽂히는 슬픔을 느끼셨으리라(마 14:10~13; 요 11:34~36).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고 싶으셨는데 떠나 달라는 말을 마을 책임자들에게 들었을 때 마음이 상하셨으리라(막 5:17). 자신의 동기가 거듭 오해를 받을 때 절망스러웠으리라(눅 9:54~56).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할 때 가슴 아프셨으리라(요 18:17). 자기가 구원하러 온 사람들에게 공격당하고 죄인 취급받으며 수치와 고통 속에 죽으셨을 때가 그 절정이다(시 69:20~21). 그것은 성공처럼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빗대어 나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인간이라는 망가진 존재이며 숱한 부정적 감정과 실패를 경험한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하기 위해, 나의 경험을 겪기 위해, 인간의 고통 속에서 나와 한 형제가 되기 위해 오셨다. 그분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내 것이 아닌 믿음과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다. 명백한 실패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삶에 더 큰 승리의 그림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소망이란 무엇인가?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소망이 아닌 것이다(롬 8:24). 결과가 명백한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궁극적 승리를 소망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런 이야기는 의미가 퇴색하는 것일까?
해외 선교지로 가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매력이 넘치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나라는 존재는 동일하다. 오히려 자기 문화의 테두리 바깥에서 살면 성격의 결함과 실패가 더 크게 도드라진다. 선교사들이 전하는 극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복음이 전진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감에 거듭거듭 빠져들기 때문에 교회 안에 해외선교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싶다.
실상을 말하자면 선교사들이 늘 복음의 전진을 목격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에게는 자주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명백한 실패가 허다하다.
지금은 해외선교지로 돌아가지 못하지만 거기서 보낸 시간을 통해 지금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선교지란 내가 가는 장소나 내가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빛을 발하도록 그분이 내 마음에 만들고 계시는 공간에서 시작되는 존재의 상태이다. 슬픔과 고난 속에서 발하는 형제애의 이야기이다. 수치의 이야기, 실패의 이야기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는 치유의 이야기며 자아 희생적인 사랑이 승리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나에게 들려주시오
예수님의 이야기
내 맘에 다 새겨 주오
가장 귀한 이야기
*Frances J. Crosby, “Tell Me the Story of Jesus,” The Seventh-day Adventist Hymnal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85), no. 152
켈시 벨코트 간호사이며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선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대학에 재학 중이며 올 6월 이학석사-임상간호사 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발문
거기서 무얼 하고 온 것인가 싶었어요. 부족한 것 투성이인 곳에서 아무런 도움도 안 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