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발자취
담장 없이도 안전한 학교
말론 E. 올슨, 홈스터디의 선구자
말론 엘즈워스 올슨은 직장을 잃었다. 네브래스카 링컨에 있는 유니온대학 이사회가 1923년 초 그를 해고했기 때문이다. J. L. 쇼 대총회 재무가 표현한 대로 “성실하고 유능하고 신실하게 29년간 봉사”1한 뒤의 일이었다.
그가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왜 해고당했을까?
생애 첫 50년
말론 올슨은 1888~1897년에 봉사했던 올레 안드레이스 올슨 대총회장의 아들이다. 재림교인 중 두 번째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09년 미시간대학에서 완성한 그의 논문 ‘성경 산문의 발달(Evolution of Biblical Prose)’의 요약본은 나중에 교단에서 출간됐다.
올슨의 업적들은 학계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다년간의 탁월한 사역은 일생에 걸친 철저한 준비를 통해 이루어졌다. 어린 시절에 머물던 위스콘신의 그린 베이에서 그리고 아버지가 스칸디나비아 재림교회 사업을 위해 이주한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나(오슬로)에서 엘렌 화잇이 집에 찾아왔을 때 올슨은 마음이 매우 편안했다고 기억했다. 엘렌과 남편 제임스 화잇이 그들의 필요를 너무 잘 이해하는 것 같아 어떤 친척도 “제임스와 엘렌 화잇보다 더 완전히 우리의 마음과 애정을 얻지 못했다.”고 그는 나중에 진술했다.2
아버지가 대총회장이 되어 다시 가족이 미국으로 이사했을 때 말론은 새롭고 멋진 멘토를 찾았다. 구들로 하퍼 벨 영어 교수였다. 남은 생애 동안 벨은 영국과 미국 문학(특히 벨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워즈워스)의 즐거움과 통찰을 올슨과 함께 나누곤 했다.
1894년, 배틀크리크대학 졸업과 세기의 전환기 사이에서 올슨은 대총회장인 아버지의 비서로 일하며 미시간대학에서 상급 공부로 영어를 전공했고 <애드벤티스트 리뷰>에 자신의 초창기 기사들을 썼다. 재림교회 정기 간행물에 자기 이름으로 기고한 300개 기사 중 초기의 것들이다.
새로운 세기의 첫 10년 동안 올슨은 영국에서 의사인 형 A. B. 올슨을 도와 건강 사역에 열심을 냈다. 1901년 11월에 그들이 창간한 <굿 헬스(Good Health)>지는 1906년에 7만 5,000부나 발행됐다. 그것은 영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건강 저널이 되었고 주요 공공 도서관에 비치됐다.
그해 올슨 형제는 책 2권을 또 출판했다. 생리학 관련 주제를 다룬 <굿 헬스> 단행본과 <100가지 건강 식품 조리법(One Hundred Hygienic Food Recipes)>이다. 올슨은 또 자신의 책 <야외 활동(Out-of-Doors)>을 출판했다. 그 책에서 권장한 건강을 위한 걷기와 조깅은 100년이 지나서야 크게 유행을 탔다. 올슨은 자신의 책을 평소에 존경하는 스포츠 애호가인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헌정했다. 그의 책은 큰 인기를 얻어 4년 뒤 미국에서 다시 출판됐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선교사 훈련을 위해 워싱턴 D.C. 근교에 신설된 워싱턴 외국인 선교신학교에서 교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책을 집필했는데 16년 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원과 발전사(A History of the Origin and Progress of Seventh-day Adventists)>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덴마크의 목회자 딸인 리디아 크리스텐센은 영어를 배우고 싶어 올슨의 수업을 들었다. 또 그녀는 올슨에게 개인 교습도 받았다. 그들은 영어보다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고 함께 남은 생애를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둘은 1910년에 결혼했고 5년 만에 앨리스, 올런 그리고 이본을 포함하여 식구가 5명으로 늘었다.
1917년에 올슨은 자신의 멘토인 벨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사우스랭커스터 아카데미를 지도하기 위해 매사추세츠로 이사했다. 다음 해 학교는 이름을 랭커스터전문대(현재의 애틀랜틱 유니온대학)로 바꾸었다. 올슨은 수치료, 목공, 재봉, 효율적인 선교 등 실제적인 훈련을 강조했다. 1920년까지 그곳에서 봉사하다 영어 학과를 지도하기 위해 유니온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1923년에 갑작스레 해고당한 그는 그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해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념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였음이 판명됐다. 그 학과의 다른 영어 교수 로셸 필몬이 학과를 운영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겉으로 보이는 이유였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올슨의 영어 수업 필독서와 관련하여 문제들이 있었던 듯하다.
파이어사이드에서 HSI로
재림교회 교육계에서 왈라왈라대학교와 킨 아카데미에 있는 교육자들뿐 아니라 구들로 하퍼 벨도 통신교육학교 개발을 잠깐시도한 적이 있다. 1909년 워싱턴 D.C.에서는 W. E. 하월을 교장으로 프레더릭 그릭스 파이어사이드 통신교육학교가 설립되었고 운영 중에 있었다. 통신교육학교의 주창자로서 올슨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기억 혹은 그의 확실한 학문적 자격 아니면 그의 적격성에 대한 J. L. 쇼 대총회 재무의 확신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그가 쓸모 있어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를 지금 필요한 그 지점에 이르도록 줄곧 적합하게 하셨기 때문이었을까? 교회 지도자들은 1923년에 파이어사이드 학교를 이끌도록 올슨을 불렀다.
올슨은 곧 워싱턴에 도착했고 왕성하게 일을 추진했다. 1927년 말에 파이어사이드는 교단 내의 어느 학교보다 등록생 수가 많은 학교로 성장했다. 1930년, 파이어사이드는 홈스터디교육원(이하 HSI)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HSI는 50개여 국가에서 학생 2,711명이 등록했고 아시아, 인도, 호주, 남아메리카와 유럽에도 새로운 지부를 개설했다.
올슨이 볼 때 재림교회 청년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는 재림교회 학교 안이었고 HSI는 “다니던 대학에 일시적으로 다닐 수 없는” 학생들을 도와야 했다.3 다른 재림교회 대학들이 항상 협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1942년, 엠마누엘 미셔너리칼리지(이하 EMC)에서는 조지 밴더만이 본교의 학업에만 전념하도록 환불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올슨의 23년 봉사를 통해 HSI는 전 세계를 위해 사역하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의 기관이 되었다.
이후의 생애(1946~1952)
73세에 은퇴한 올슨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생겼다. 임종 몇 주 전에 완성된 마지막 주요 프로젝트는 <애독서들(Much-Loved Books)>의 출간이었다. 그 책은 루터, 워즈워스, 소로, 휘티어의 문학적 작품들에 대한 고찰로 그중에는 제임스와 엘렌 화잇에 관한 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 책에서는 성경 연구를 단순히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옹호하고 있다.
은퇴한 올슨은 워싱턴 미셔너리칼리지(현 워싱턴 재림교회 대학)에서 고급 문학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뛰어난 대화가이며 동정적인 경청자인 교수의 방에 종종 들렀다.
1952년에 올슨은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건강 옹호자, 재림교회 고등 교육의 개척자, 교회 역사가, 다작가 그리고 학생들의 친구로서의 올슨은 그의 작품을 통해 그 영향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
1 J. L. Shaw to M. E. Olsen, Apr. 18, 1923.
2 M. E. Olsen,
3 M. E. Olsen, “An Alarming Situation: Are We Facing It Courageously?”
존 웨슬리 테일러 V 대총회 교육부 부부장이다.
발문
올슨이 볼 때 재림교회 청년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는 재림교회 학교 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