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꾸러미
프랭크의 아기
아주 오래전(1984년), 먼 나라(미국)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전 세계 패스파인더를 모아서 국제 캠포리를 처음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 앞서 준비하셨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캠프 장소로 선정된 곳은 콜로라도주의 미 육군 제10사단 캠프였다. 그런데 미군은 이미 그 캠프를 버리고 계곡에 있는 건물을 모두 허물었기 때문에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캠프 헤일(부대 이름)’은 없어졌지만 개척대원 6,000명이 텐트를 치고 기능 활동을 진행하고 큰 집회를 개최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나는 전체 계획을 관리해 달라고 청을 받았다. “이 오래된 캠프 헤일이 패스파인더 대원과 지도자 6,000명을 위한 마을이 되게 해 주세요. 물, 화장실, 음식, 얼음, 무대, 음향 장치, 안내센터 천막 그리고 전화를 설치해야 합니다. 8일 동안 캠프를 운영하고 난 뒤에는 캠포리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원상 복구해야 하고요.”
“알겠죠?”
“예, 알겠습니다!” 나는 거수경례를 했다.
나는 캘리포니아에 살았지만 콜로라도를 잘 알았다.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생각하니 신이 났다. 몇 주 안에 나는 물, 텐트, 캠핑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개척대 지도자 팀을 꾸려 실행에 돌입했다.
최초 예상 인원은 6,000명에서 8,000명이었으나, 결국 1만 4,000명으로 결론이 났다. 우리 팀은 이동용 화장실을 더 주문하고 매일 얼음 배달을 관리할 사람을 찾고, 래프팅 일정을 조정하고, 커다란 무대를 설계했다. 환상적인 팀워크였다.
***
준비 중 북미지회의 개척대 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딕, 콜로라도의 사회복지과에서 두툼한 편지가 왔어요. 우리가 캠포리를 개최하기 전에 캠프 헤일을 보육 시설로 등록해야 한다고 하네요. 서류 뭉치를 보내 줄 테니 해결해 주세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기도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가족과 팀을 모았고 콜로라도 사회복지과 문제를 위해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페덱스에서 서류를 배달해 주었다.
“귀 교회가 이글강에 있는 오래된 캠프 헤일 육군 기지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할 계획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규정상 보육 시설로 등록되어야 하니 동봉한 250쪽짜리 매뉴얼을 숙지하시고 그에 맞게 지원서를 작성해 주십시오.”라고 적힌 편지에는 프랭크라는 이름이 서명되어 있었다.
완벽한 보육 자격을 위해 복지과가 원하는 수많은 필요 조건을 만족시킬 방도가 없었다. 심지어 어린이 7명당 화장실 1개를 요구했다. 이동용 화장실 2,000개가 있어야 했다. 기적이 필요했다.
나는 콜로라도에 전화를 걸어 프랭크 씨와 약속을 잡고 캘리포니아에서 콜로라도로 날아가 렌터카를 타고 덴버 시내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캠포리를 개최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 기도와 간절한 마음을 들으시고 제가 주님을 분명히 나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늘 주님의 능력을 보여 주소서.”
4층으로 올라갈 때 엘리베이터가 철컥 소리를 내더니 삐걱거렸다. 볼품없는 회색 엘리베이터, 더 볼품없는 회색 콘크리트 복도! 어둡고 차가웠다. 나는 낙담이 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문을 노크하며 기도했다.
삐거덕 문을 열고 안내 데스크로 걸어갔다.
“프랭크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제 이름은 딕 더크슨입니다. 캠프 헤일에서 개척대 캠포리 일로 찾아뵈었습니다.”
접수 담당자가 한참 동안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았다.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프랭크!”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더크슨 씨가 왔어요.”
운수 사납게 생긴 덥수룩한 까만 수염에 거대한 곰같이 생긴 남자가 일어나서 자신의 책상으로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내 마음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잘 안 될 것 같았다.
“주님?” 나는 기도했다.
“규칙은 규칙입니다.” 개척대와 캠포리에 관한 설명을 듣고 그 장소를 본 뒤 프랭크 씨가 한 말이었다. “어린이가 얼마나 많든, 무슨 목적으로 오든 규칙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하나님, 어디 계신 건가요?”
프랭크 씨는 작별 인사를 하려고 일어섰다. “이름이 뭐라고 하셨지요? 더크슨인가요?”
“예, 더크슨, 딕 더크슨입니다.”
“혹시 덴버에 친척이 있으세요?”
있었다. 캘리포니아, 영국령 기아나 그리고 콜로라도에서 수많은 아기들의 출산을 돕고 있는 의사 삼촌이 한 명 있었다. 어떤 이들은 에디 삼촌을 무척 좋아했다.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한 분이 있어요. 에디 삼촌이요.”
“에드워드 더크슨 박사님이 삼촌이세요?”
카우보이 부츠에 낡은 청바지, 웨스턴 셔츠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프랭크 씨가 바짝 다가왔다.
“예,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며 웃자 프랭크 씨는 큰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앉으세요.” 그가 자리를 권했다. “약 1년 전쯤 아내와 저는 사내아이를 기대하며 출산하려 했어요. 에드워드 박사님이 우리 담당 의사셨죠. 그런데 아기가 예정보다 일찍 나오게 되었는데 아내와 아이에게는 정말 너무 어려운 출산이었어요. 둘 다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었지요.”
나를 무척 놀라게 했던 곰같이 생긴 프랭크 씨가 내 손을 꼭 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에드워드 더크슨 박사님은 제 아내의 병실에 특별한 간이침대를 갖다 놓고 거기서 3일 밤을 지새면서 아내와 아들이 무사한지 살펴 주셨어요. 그분도 당신처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었어요. 맞죠?”
“맞아요. 그리고 개척대원이었죠.” 내가 대답했다.
프랭크 씨는 웃으며 내게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가 사무실을 통과하여 걸어갈 때 프랭크 씨는 지나가는 책상마다 나를 “더크슨 박사의 조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리고 상사의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엘리자베스 상사님, 이분은 캠프 헤일에서 패스파인더 캠포리를 계획하고 있는 딕 더크슨 목사님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더크슨 박사님의 조카입니다. 이곳에서 캠포리를 위해 큰 계획을 갖고 계시네요.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상태 그대로 승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에디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덴버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삼촌은 울면서 말했다. “딕, 작년에 내가 병실 간이침대에서 잤던 게 한 30곳은 될 거야. 정말 멋진 일이구나. 하나님께서 나 같은 늙은이도 여전히 사용하시다니!” 삼촌과 나는 울며 함께 기도했다.
***
콜로라도 사회복지과에서 내준 허가서가 지금도 내 책상 곁 벽에 걸려 있다. “콜로라도 캠프 헤일에서 1985년 7월 19일부터 1987년 7월 19일까지 9~16세 어린이 1만 8,000명을 위한 캠프를 운영하도록 허가서를 발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