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조용한 은사들
공중 전도만이 전도는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데이비드 트림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작은 집, 아주 작은 집에 그들은 살고 있었다. 골함석 지붕을 얹어 놓은 20세기 중반 호주의 평범한 주택이었고 썩 좋은 건물도 아니었다. 그 집은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길 끝에, 아니 기차역 너머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열차 운행용 석탄 더미 바로 너머에 있었다. 길은 기차역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흙길이 역 너머로 이어지고 있었다. 작고 볼품없는 집으로 연결된 그 길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애그니스와 남편 테드 그리고 자녀 8명이 기차역 너머의 이 집에서 살고 있었다.1 남편이 철도에서 일하기 때문에 그리로 왔다. 남편은 증기기관차의 화부(火夫)였다. 화부는 삽으로 석탄을 엔진의 불꽃 속에 떠 넣어야 한다. 그래서 가족들은 석탄 더미 바로 옆에, 역사 너머로 길이 끝나는 곳에 살게 된 것이다.
머스웰브룩이라는 이 작은 마을의 다른 곳에는 애그니스의 딸 팸이 살고 있었다. 팸은 결혼하여 남자아이를 낳았다. 역 너머에 있는 집에서 애그니스는 항상 외로웠다.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은 팸밖에 없었다. 애그니스는 가끔 생각해 보았다. 1950년대 초 호주에서는 판매원들이 집집마다 방문하여 물건을 파는 일이 흔했는데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판매원은 하나도 없었다.
애그니스는 인근 장로교회의 여성 모임에 다녔다. 어느 일요일, 급진적인 이단이면서도 기독교로 자처하는 두 그룹이 이웃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여자들이 수선을 떨었다. 여호와의 증인이 머스웰브룩에 왔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까지. 그들이 집 문을 어떻게 노크하는지에 대해 여자들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애그니스는 생각했다. ‘역을 지나 길 끝에 사는 게 다행일 때도 있네.’
마을에 재림교인이 왔다!
여호와의 증인은 애그니스의 집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어느 날, 팸과 아들이 애그니스의 집에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누구도 문을 두드리지 않던 그 집에 말이다. 애그니스와 팸이 다니는 장로교회 목사조차 방문한 적이 없는 집이다. ‘누가 집을 잘못 찾아왔나?’ 애그니스는 생각했다. 모녀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테드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이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릴 사람은 철길 노무자들밖에 없거든. 우리가 여기 산다는 건 그들만 알고 있어.’
두려운 마음으로 애그니스가 문을 열었는데 키 작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몸에 맞지 않고 새것도 아니지만 다림질이 잘 되어 있는 푸른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애그니스는 놀라서 물었다. “누구세요?” 그 남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목사였다.
애그니스는 ‘보시다시피 저는 장로교인이에요. 교회에 다니고 있고 당신들의 이상한 교리를 들을 필요가 없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누군가 찾아와 집 문을 두드리는 것이 드문 일이었기에 그 대신 이렇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그 당시 호주의 문화에 따라 애그니스는 그 젊은이에게 차 한 잔을 대접했다. 그는 정중히 거절하면서 차 대신 물 한 잔을 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애그니스와 팸과 함께 그들의 가족에 대해, 그들의 남편들, 애그니스의 다른 자녀들, 여인들의 희망과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 세상을 초월한 희망, 그들의 모든 걱정을 뛰어넘는 희망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리를 뜰 때 팸은 그와 함께 성경을 연구할 마음이 생겼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몇 달 동안 그녀는 그와 함께 성경을 연구했다.
애그니스는 약간 망설였지만 팸이 성경 연구에서 배운 것을 들려주자 곧 공부에 합류했다.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 독자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애그니스, 테드, 그 외 세 형제자매 그리고 팸의 아이들까지 모두 침례를 받고 재림교인이 되었다.
재림교회의 독특한 전도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 목사는 나의 아버지 존 트림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들이 어떻게 재림교인이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재림교회에서 공중 전도자들은 유명 인사다. 역사적으로 대부분 그랬다. 메릿 E. 코넬부터 마크 핀리, H. M. S. 리처드, C. D. 브룩스, 존 러프버러, 존 카터에 이르기까지 복음 전도자들은 전설적인 인물이고 재림교회의 ‘스타’이다. 그들의 탁월한 기량 덕분에 공중 전도는 재림교회에 크게 기여했고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 교단이 존재하게 된 것은 대규모 복음 전도 집회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초기 개척자들은 그것을 기반으로 삼은 게 아니다. 물론 1860년대까지 존 러프버러와 메릿 코넬은 대형 천막을 설치하여 전도회를 개최했고 ‘대형 천막’은 우리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그런데 185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셉 베이츠, 제임스 화잇, 존 바잉턴, 기타 개척자들은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작은 마을에 들러 개인이나 가족을 만나 성경을 연구하며 재림교회의 기초를 닦았다.
우리의 초기 ‘복음 전도자들’은 새로운 마을에 가면 “이곳에 혹시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묻곤 했다(밀러주의자였던 이들을 찾는 암호와 같은 질문). 그와 함께 “여기 성경 연구에 열심인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질문도 번갈아 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찾으면 그들은 문을 두드렸고, 환대를 받으면 그들과 성경을 연구했다. 본래 재림교회 운동은 대규모 공중 전도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가정을 찾아가 그들과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했다.
공중 전도의 한계
이 점은 역사적 사실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서도 중요하다. 법적인 제재 때문에 공중 전도회를 개최할 수 없는 나라가 많다. 정부가 기적적으로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예언 세미나 혹은 대규모 전도회에 참석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사람이 전 세계에 최소 20억 명이나 된다. 유럽, 북미, 중남미 여러 지역에서도 공중 전도는 더 이상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도 방법이 아니다.
홍보가 얼마나 잘되었는지, 재정적 후원이나 물류 지원이 얼마나 후한지, 그래픽이 얼마나 뛰어난지, 설교가 얼마나 강력한지, 전도회 조직·지원·운영 담당자들이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영성이 충만한지에 상관없다. 진작부터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은 대부분 공중 전도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유럽에서 이것은 오래된 문제다. 서던 재림교회 신학대학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공중 전도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2
공중적인 활동에 대한 반응이 어색함과 무관심이라면 전도를 포기하고 싶은 위험이 생긴다. 만약 전도가 공중 전도뿐이라면, ‘전도는 효과가 없으니 내부에만 신경을 쓰자. 딱히 무엇을 더 하겠는가?’라고 쉽사리 생각해 버릴 것이다.
전도는 공중 전도만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복음 전도가 있다. 사람들의 집 문을 두드려 그들을 만나는 것,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 그들과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사용했던 방법이다. 아버지가 완벽한 인간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아버지만큼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지만, 그분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관점에서 그리고 주어진 소명에 비추어 볼 때 아버지의 한계 중 하나는 공중 전도에 은사가 없었다는 점이다.
애번데일대학에서 목회자 양성 과정을 마친 뒤 아버지는 조지 번사이드가 이끄는 대형 전도회에서 봉사했다. 번사이드 목사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명한 인물이다. 놀랄 정도로 강력한 그의 전도 설교로 1940~50년대에 이들 나라에서 교회가 눈에 띄게 성장했다.
번사이드를 도왔던 아버지는 당시 지역 교회를 담임했다. 자체적으로 전도회를 개최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열심히 노력했으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후에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천성적으로 수줍음을 많이 타서 공중 전도에 참여하면 종종 불편해하셨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사람들과 성경을 연구하고 교인들에게 성경 교수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 흔쾌히 성경을 배우고 전도회까지 참석하고 싶게 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걸 아버지는 깨달으셨다. 또 라디오와 신문을 활용하여 재림교회를 껄끄러운 기피 대상이 아니라 유쾌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로 알릴 수 있는 방법도 발견하셨다.
건강 사역과 절제에도 열정이 컸다. 금연·금주 강습으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1970년대에는 혈압·스트레스 수치 조절법, 운동하는 방법, 건강 요리 강습으로 사람들이 재림교회에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이 땅에서 건강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다 보면 영원히 사는 길까지도 가르칠 수 있다고 믿으셨다.
그리스도의 방법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사역 방법을 활용하셨다. 이 용어는 엘렌 화잇의 깊은 관찰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방법만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인간의 유익을 갈망하며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은 그들을 동정하고 필요를 채워 주고 신임을 얻으셨다. 그런 다음에 ‘나를 따르라’라고 명령하셨다.”3
아버지는 3개 국가에서 그리스도의 방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셨다. 뉴질랜드와 인도에서는 지역사회 건강 전도의 주도자가 되셨고 호주에서도 같은 사업을 도왔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미디어를 활용하여 교회를 홍보하셨다.
그러나 원활한 소통, 교회의 친근한 이미지 그리고 스트레스를 줄이고 병원 입원을 방지하는 건강 생활 강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걸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 예수님도 이 모든 일을 하셨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일을 하셨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치료봉사>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동정하고 필요를 채워 주고 신임을 얻으신 뒤에 “나를 따르라”라고 명령하셨다. 우리 역시 어느 시점에 이르면 사람들에게 주님을 따르도록 명해야 한다.
아버지는 ‘명령하는 사역’을 잘 알고 계셨다.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그들의 마음이 재림교회로 이끌리기를 바라셨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과 성경을 연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요한과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다음 구절을 재림교인들은 잘 알고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리스도께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분처럼 문밖에 서서 두드려야 한다.
전 교인이 참여하는 일
내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마지막 이유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중에는 복음 전도자의 은사가 없는 사람이 많다. 누구나 수천 명 앞에서 설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흔치 않은 은사다. 전도라는 것이 단지 전문 사역자(종종 전문적인 복음 전도자)에 의해 수행되는 공중 전도뿐이라면 전도는 전 교인이 참여하는 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면에 영적 은사가 있다면, 자신이 위대한 재림운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거나 복음 전하는 일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3년 전, 요양병원에서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 네 아버지와 내가 알고 지내던 여자분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 우리는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다른 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어머니는 한 노인 여성과 반갑게 인사하셨다. 바로 팸이었다. 그녀의 딸 하나와 손녀딸이 방문차 와 있었다.
팸은 이 기사 앞부분에 소개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런 다음 눈물을 글썽이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성경 말씀을 읊었고 이렇게 말했다. “데이비드, 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역을 지나고 석탄 더미를 지나서 우리 집 문을 두드리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 온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당시 애그니스의 집을 방문하고 싶지 않은 유혹도 들었다고 하셨다. 그때는 뜨거운 여름 한낮이었고 아버지는 지쳐 있었다.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집을 다 찾아가겠다고 주님께 약속했거든.” 그래서 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마지막 집으로 향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받은 영적 은사는 집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우리 주님이요 구원자이신 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맡은 역할이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65년 전 머스웰브룩의 존 트림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1본 기사에 사용된 이름들은 가명이다.
2Alan Parker, “Does Evangelism Still Work?”
3엘렌 G. 화잇, <치료봉사> 143
데이비드 트림은 대총회 자료·통계·연구소 소장이다.
발문
법적인 제재 때문에 공중전도회를 개최할 수 없는 나라가 많다.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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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아버지 존 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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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트림(왼쪽에서 두 번째)는 금연 강좌 등 지역사회 봉사 활동을 후원하며 목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