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발자취
느리지만 확실하게
일본 재림교회 선교 역사
일본 그리스도교의 뿌리는 1549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말, 30만 명 정도의 그리스도인이 일본에 살았다. 그렇지만 17세기에 막부 정권은 그들을 가혹하게 박해했다. 회심자들이 일본의 전통적인 사회 질서를 허물고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30년 안에 일본 교회는 본토인 신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심지어 산 채로 화산에 던져지면서 대부분 근절되었다. 정부는 외부 그리스도인과 어떤 접촉도 하지 못하도록 했고 대다수 외국인이 일본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다시 시작된 기독교 선교
1850년대 서구 열강은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여 강제로 개항하게 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1855년에 일본에서 다시 사역을 시작했다. 1888년에는 4만 4,500여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2만 5,500여 개신교인이 다른 교파의 교인들과 함께 살았다. 이듬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그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자급선교사 아브람 라루가 1888년 5월, 홍콩에 자신의 선교 기지를 마련했다. 1889년에 그는 일본으로 가서 출판물을 배포했다. 이듬해 재림교회의 탁월한 미국인 지도자 S. N. 해스켈이 일본을 방문하여 “우리는 일본에서 한 남자에게 침례를 주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국외 거주자(아마도 라루의 출판물을 읽었던 사람일 것임)를 만난 해스켈은 “안식일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1는 흥미로운 진술을 남겼다.
일본 선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공식적으로 동아시아에 파견한 첫 번째 선교사는 윌리엄 C. 그레인저이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힐즈버그대학 총장으로 있다가 일본에서 일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는 1896년 11월에 도착했다. 일본 재림교회가 1899년 초에 공식적으로 조직되었고 같은 해에 그레인저는 일본어로 된 첫 번째 재림교회 정기 간행물인 월간지 <오와리 노 후쿠인(말세 복음)>을 창간했다.
안타깝게도 그해 후반부에 그레인저는 중병에 걸려서, 1899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
그렇지만 재림교회의 사업은 그레인저의 뒤를 따르는 다른 선교사들과 본방인 사역자들로 인해 점차 성장해 갔다. 최초의 일본 의료 기관인 고베병원이 1903년에 설립됐고 12개월 안에 일본대회가 공식 조직됐다. 1914년에는 최초의 사역자 양성 기관인 ‘니혼 덴도 가코(일본 전도 학교)’가 건립되었다.
1919년, 일본대회는 교회 14곳, 교인 305명, 안수목사 7명, 사역자 38명으로 일본 미자양 연합회가 되었다. 1930년대까지 일본 재림교회 사업은 선교사들이 짐을 졌지만 그들은 본방인 사역자들과 아주 친밀하고 조화롭게 협력했다고 알려졌다.2
국가주의와 세계 전쟁
1930년대에 일본 정부는 점점 더 전제주의로 치달았다. 서구 열강과의 전쟁을 예상한 일본 지도자들은 외국 종교를 심각하게 의심했다. 1939년에 종교기구법을 통해 모든 개신교 단체를 정부가 지명한 지도자들 밑으로 강제 합병하기 시작했다. 일본 성결교회, 일본 성공회와 함께 일본연합회는 이를 거절했고 일본 정부에 의해 해산됐다.
서양 선교사들은 얼마 후에 추방당했고 교회의 지도력은 본방인 지도자들에게 넘어갔다. 전쟁 기간에 재림교인들은 특별히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지도자 42명이 수감됐고 그중 4명이 학대로 숨졌다.3
전쟁 이후의 르네상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고 일본이 점령당하자 일본인의 자긍심은 심하게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16세기 이후로 전례가 없을 만큼 (옳든 그르든) 유달리 미국적인 것으로 보이는 기독교에 20년 동안 문이 열렸다.
1945년에 일본 그리스도인은 20만 명 정도였는데 12년 내에 그 수는 35만 2,000명이 넘었다. 재림교인도 1946년 600명에서 1958년에 3,900명까지 늘었다.
교회의 강력한 건강 기별 그리고 술과 담배를 일관성을 있게 거절하는 교인들의 긍정적인 인상이 성장에 긍정적 요소가 되었다. 또 선교사 상당수가 도움을 주었는데 전쟁의 여파로 그들의 봉사가 다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표는 일본인 교회의 성숙을 돕는 데 있었다. 1984년 대총회 행정위원회의 표결로 1985년 1월 1일에 일본연합회가 재조직되었을 때 이것은 실현되었다.4
성장 정체기
일본 경제에 붐이 일고 북미와 유럽의 경제의 맥이 풀리던 1970년대에는 일본이 서양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힘을 잃었다. 일본 기독교의 성장은 지지부진해지고 궁지에 몰렸다.
1963년에 일본 그리스도인 수는 9천만 인구 중 75만 명 정도였다. 3년이 지난 1966년에 100만 명을 돌파했지만 1985년도에도 여전히 1백만 명 부근이었다. 재림교인 수는 1963년에 5,500명이었고, 1966년에 6,400명, 1985년에는 1만 1,600명으로 늘었다. 재림교회는 일반적으로 일본 기독교의 정체기에도 성장했다. 그러나 더 큰 흐름이 재림교인들을 따라잡았다. 2003년 일본연합회의 교인 수는 처음으로 1만 5,000명에 도달했지만 15년이 지난 뒤에도 숫자는 1만 5,200명에 그쳤다.
미래
해결은 쉽지 않다. 그러나 격려할 만한 근거들이 있다. 2018년 5월, 일본은 전 교인 선교 운동을 주도적으로 시행하는 지역이 되었다. 2016년의 르완다처럼 수만 명이 침례 받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일본 교인들이 힘을 발휘하여 다시 전도에 집중토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런 일이 성취되고 있다는 몇 가지 조짐이 보인다.
더욱이 오랜 세월 동안 일본 재림교인들은 매우 신실하게 십일조를 드렸고 동시에 곳곳에서 십일조 대비 매우 높은 비율의 헌금을 드렸다. 일본연합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헌신하고 있다.
일본대회가 조직된 지 120년이 지난 지금 일본 재림교회는 자신의 동포들이 부활하신 구주의 복음을 듣기를 갈망한다. 400년 전, 그리스도교가 일본에 들불처럼 퍼졌다. 하나님의 능력과 전 교인 선교 운동을 통해 그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데이비드 트림 대총회 자료·통계·연구소 소장이다.
1 “Movements of Missionaries,”
2 Shinmyo, Tadaomi, “A History of the Seventh-day Adventist Church in Japan from 1896 to 1950” (M.A. thesis, Philippine Union College, 1972), p. 257
3 A. Hamish Ion, “The Cross under an Imperial Sun,” in Mark R. Mullins (ed.),
4 General Conference Executive Committee, Aug. 23, 1984, Minutes 1984: pp. 269~270
캡션
20 재림교인 사역자들의 자녀들
21 도쿄에서 아내 엘리자베스와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