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남은 자손과 함께 살기
오드리 앤더슨
굉장한 사진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사진작가는 모든 장면을 제대로 포착해 냈다. 내 말에 사진작가는 웃으며 설명했다. “그 사진은 구름 낀 우중충한 날에 찍은 거예요. 포토샵으로 조정해서 색상의 균형을 맞춘 거죠. 설마 보이는 이미지가 원판 그대로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 건 아니겠죠? 현실과는 상관없어요. 완벽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전부니까요.”
‘완벽한’ 그림으로 ‘완벽한’ 삶을 보여 주려는 강박에 사로잡힌 이 시대에 가정, 직장, 학교, 교회에서 덜 완벽한 현실을 마주 대하면서 우리는 맥이 빠진다.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교회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어느새 스멀스멀 비판이 피어오른다. “좀 개선해야죠. 지금이 21세기인데. 조직이 너무 낡았어요. 왜 교회는 그냥 이대로인가요?” 이야기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우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완벽한 교회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과연 그럴까?
다섯 가지 요소
교회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부서진 사람들, 즉 죄인들을 위한 집이다. 이들과 함께 살기란 쉽지 않으며 이내 긴장감이 드러날 것이다. 이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과 동일한 문제를 겪으셨다. 예수님과 3년을 보낸 후에도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지, 누가 하늘 왕국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지 다투고 있었다. 그러니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님의 남은 백성으로 살면서 여전히 긴장과 도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단순한 생존을 위한 삶에서 도약하기 위해 취향, 관점, 편견, 관행, 원칙에 관해 생각해 보자.
취향
취향의 문제에 불과한 일이 있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취향의 차이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일 채소와 과일 일정량을 섭취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채소와 과일을 좋아한다. 그게 내 취향이다.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나는 빨간색 카펫을 선호하고, 동생은 파란색을 선호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것보다 나은 것도 아니다. 취향의 문제일 뿐인데 카펫의 색상이나 설비 문제로 교회가 분열된다. 새로운 개혁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먼저 물어보자. ‘이것이 성경의 진리인가 혹은 개인의 취향인가?’ 솔직히 몇 주만 지나면 그토록 싫어했던 파란 카펫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관점이나 편견
영국의 코번트리 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았다. 전쟁이 끝난 뒤 재건된 성당에는 ‘연합의 예배당’이라는 원기둥 형태의 건물도 있다. 그 안에는 둥근 벽을 돌아가며 일정하게 벽감을 만들어 놓았다. 예배당 중앙에 서서 천천히 둘러보면 모든 벽감을 볼 수 있지만 다른 위치에서 보면 사각지대가 생긴다.
우리 모두에게 사각지대나 편견이 있다. 사실, 논리, 경험에 입각하지 않은 의견이나 느낌이 있다. 시야가 가려지면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고 보기가 힘들다. 편견과 관점을 버린다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셨던 야곱의 우물가에서 이것을 나타내셨다. 여인의 편견이 무너지고 관점이 바뀌자 마을 전체가 예수님을 배우게 되었고 제자들은 선교의 본질을 더 잘 깨달을 수 있었다.
관행
아이들은 자라면서 “왜”라고 묻는 때가 온다. 왜 이를 닦아야 해요? 왜 학교에 가야 해요? 이건 왜? 저건 또 왜? 수천 가지 질문이 쏟아진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성장 과정이다. 교회에서도 새로운 세대는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구세대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이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검토하도록 독려해야 하며 개인의 취향을 고수하거나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 ‘이 관행이나 일 처리 방식은 단순히 나 자신의 취향이고 늘 해 왔던 방식인가? 아니면 원칙인가?’라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
원칙
협상의 여지가 없는 문제도 있다. 정체성의 핵심이 되는 경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안식일, 성소, 재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등은 남은 백성을 구분 짓는 영원한 진리인데 우리는 습관적인 입맛대로 그 내용을 포장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분께서는 여전히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시다. 하늘로 가는 길에는 지름길도 없고, 입구는 하나이지만 우리의 여행은 각각 다를 수 있다.
공항에 착륙하여 들어선 거리는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난장판이 따로 없었지만 우리 차를 몰고 가는 운전기사에게는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자동차, 나귀, 자전거, 낙타, 트럭, 보행자가 함께 길을 차지했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경험은 다 달랐다.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차에서 우리는 열기와 먼지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걷는 것보다는 당나귀나 낙타를 타고 상대적인 편안함을 얻는 것이 더 낫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복잡한 도로를 이리저리 빠져나갈 수 있었다. 보행자들도 그 나름 용케도 길을 뚫고 나아갔다.
우리는 모두 길을 가고 있다. 사는 장소, 삶의 경험과 기회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냉방 차량을 이용하는 여행자가 있는가 하면, 더위와 먼지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길을 가면서 어떤 것이 취향, 관점, 편견, 관행, 원칙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것이 앞의 넷 중 하나라면, 자신의 시선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다. 삶과 교회의 중심에서 그분과 함께할 때 우리는 서로를 더욱 잘 받아들이고 더 자세히 살필 수 있다. 현자가 말했듯이 우리 모두에게는 결점이 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오드리 앤더슨 아일랜드 태생이며 트랜스-유럽지회 총무이다. 현재 영국 세인트 앨번스에 살고 있다.
발문
하늘로 가는 길에는 지름길도 없고, 입구는 하나이지만 우리의 여행은 각각 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