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사람 잡는 어부 요나
선교와 하나님의 남은 백성
고든 R. 도스
요나 그리고 그를 삼켰다가 사흘 뒤 해변에 뱉어 낸 큰 물고기의 이야기는 모두가 좋아한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권능과 피조물을 돌보시는 그분의 능력뿐 아니라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가르친다. 요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선교와 남은 백성에 관한 통찰력을 얻어 보자.
요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사명을 전할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의 진정한 선지자였다(창 12:1~3). 하나님의 선교사인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했다(출 19:6).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는 모습을 세상 나라들이 보고 배우고 참여하도록 이끄는 영적 자기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했기에 이것이 가능했다. 이따금 요나처럼 이스라엘에서 다른 민족으로 가게 된 선교사도 있었다.
요나서에는 ‘남은 자’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남은 자’ 사상은 구약 전체에 내포되어 있고 요나서에도 함축되어 있다. 남은 무리는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무리이다.* 요나 역시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보내신 남은 무리 선교사이다.
요나 이야기는 인류를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명에 관한 더 큰 그림의 한 장면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후 잃어버린 인류를 위해 이 일을 시작하셨다(창 3:15). 아들 하나님께서는 몸소 하나님의 사명을 구체화하셨고 속죄를 통해 구원을 가능하게 하셨다(롬 3:25). 성령 하나님께서는 권능을 주시고 사명을 감독하신다(행 2:1~4).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시간에 맞춰 사명을 영광스럽게 완수하실 것이다(행 1:7). 시대마다 하나님의 남은 백성은 그분의 사명 대리자이며, 요나는 이러한 대리자 중 한 사람이었다.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움직임
이야기 서두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오늘날 이라크의 모술 지역인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신다(욘 1:2). 그의 헌신이 어느 정도였든지 간에 요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 니느웨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게다가 홀로 이교 도시와 상대할 생각을 하니 두려웠을 것이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숙적 아시리아 제국의 도시 중 하나였다. 요나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며 용서하시는 분임을 알았기에 이교도인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로 혜택을 입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4:1~3).
이야기의 두 번째 장면에서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쳤지만 하나님께서는 폭풍우로 그의 길을 막으셨고 큰 물고기로 그의 생명을 구해 주신다(1:4~3:10).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올린 기도는 영적인 걸작이다.
세 번째 장면에서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 부르시고 선지자 요나는 순종한다(3:1~3). 어쨌든 요나는 지중해 어딘가에서 니느웨까지 긴 여행을 했다. 니느웨에 도착하자 그는 곧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철회하셨다(3:4~10).
네 번째 장면에서는 요나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에 자비와 동정을 베푸신 하나님께 불만을 표하며 자신의 생명을 거둬 달라고 요구했다(4:1~3). 실제로 요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하나님, 보세요. 저는 집을 떠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매우 자비로우셔서 니느웨를 용서해 주실 줄 알았다고요. 그래서 제가 다시스로 피한 거 아닙니까?”
다음 장면에서 요나는 그 성읍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려고 도성 바깥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4:5~11). 죄로 가득한 그곳이 단 한 번의 회개로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는 기다렸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이 성이 멸망당해 마땅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으로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을 때,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박 넝쿨로 뙤약볕을 가려 주셨다. 그러나 이내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 넝쿨을 시들게 하셨다. 그러자 요나는 또다시 성을 내며 죽기를 바랐다.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4:10~11).
하나님은 요나 그리고 그늘이 되어 주었던 식물, 무지하고 잘못된 생각에 빠진 사람들, 니느웨의 동물들까지 그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다. 요나가 니느웨에 선포한 하나님의 진노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그분은 또한 자비와 동정심 많은 분이었다. 요나도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적으로 주장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남은 교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넘치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차오른다면, 선교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임을 명심하라. 요나를 비롯하여 당시 가장 신실하다는 이스라엘 백성조차 니느웨 사람보다 하나님의 호의와 구원을 더 많이 받을 만한 자격은 없었다. 만약 사람마다 정확하게 처분을 받아야 한다면 모두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로 불살라지고 말 것이다. 믿음, 행동, 생활 방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엡 2:8).
남은 백성은 때로 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요나는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내적으로 집중된 배타주의를 나타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동일한 배타주의를 언급하셨다(마 3:9).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별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동정심과 자비를 독점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사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남은 무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명은 요나의 사명보다 훨씬 위대했고 교회보다 크다. 요나는 니느웨에서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 뒤에도 하나님의 사명에 온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요나서는 요나와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사명이 불분명한 채로 끝난다. 요나를 위해 그리고 그의 사명을 위해, 우리는 그의 마음이 변화되었고 그가 결국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보면 어떨까. ‘예, 주님께는 누구에게나 자비와 동정을 베풀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미천한 종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 어디든 저를 보내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소서.’
*Tarsee Li, “The Remnant in the Old Testament,” in
고든 R. 도스(Ph.D.) 미국 미시간 베리언스프링스에 있는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 세계선교학 교수이다.
발문
요나 이야기는 인류를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명에 관한 더 큰 그림의 한 장면이다.
포커스
불완전한 남은 자손과 함께 살기
오드리 앤더슨
굉장한 사진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사진작가는 모든 장면을 제대로 포착해 냈다. 내 말에 사진작가는 웃으며 설명했다. “그 사진은 구름 낀 우중충한 날에 찍은 거예요. 포토샵으로 조정해서 색상의 균형을 맞춘 거죠. 설마 보이는 이미지가 원판 그대로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 건 아니겠죠? 현실과는 상관없어요. 완벽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전부니까요.”
‘완벽한’ 그림으로 ‘완벽한’ 삶을 보여 주려는 강박에 사로잡힌 이 시대에 가정, 직장, 학교, 교회에서 덜 완벽한 현실을 마주 대하면서 우리는 맥이 빠진다.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교회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어느새 스멀스멀 비판이 피어오른다. “좀 개선해야죠. 지금이 21세기인데. 조직이 너무 낡았어요. 왜 교회는 그냥 이대로인가요?” 이야기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우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완벽한 교회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과연 그럴까?
다섯 가지 요소
교회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부서진 사람들, 즉 죄인들을 위한 집이다. 이들과 함께 살기란 쉽지 않으며 이내 긴장감이 드러날 것이다. 이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과 동일한 문제를 겪으셨다. 예수님과 3년을 보낸 후에도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지, 누가 하늘 왕국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지 다투고 있었다. 그러니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님의 남은 백성으로 살면서 여전히 긴장과 도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단순한 생존을 위한 삶에서 도약하기 위해 취향, 관점, 편견, 관행, 원칙에 관해 생각해 보자.
취향
취향의 문제에 불과한 일이 있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취향의 차이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일 채소와 과일 일정량을 섭취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채소와 과일을 좋아한다. 그게 내 취향이다.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나는 빨간색 카펫을 선호하고, 동생은 파란색을 선호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것보다 나은 것도 아니다. 취향의 문제일 뿐인데 카펫의 색상이나 설비 문제로 교회가 분열된다. 새로운 개혁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먼저 물어보자. ‘이것이 성경의 진리인가 혹은 개인의 취향인가?’ 솔직히 몇 주만 지나면 그토록 싫어했던 파란 카펫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관점이나 편견
영국의 코번트리 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았다. 전쟁이 끝난 뒤 재건된 성당에는 ‘연합의 예배당’이라는 원기둥 형태의 건물도 있다. 그 안에는 둥근 벽을 돌아가며 일정하게 벽감을 만들어 놓았다. 예배당 중앙에 서서 천천히 둘러보면 모든 벽감을 볼 수 있지만 다른 위치에서 보면 사각지대가 생긴다.
우리 모두에게 사각지대나 편견이 있다. 사실, 논리, 경험에 입각하지 않은 의견이나 느낌이 있다. 시야가 가려지면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고 보기가 힘들다. 편견과 관점을 버린다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셨던 야곱의 우물가에서 이것을 나타내셨다. 여인의 편견이 무너지고 관점이 바뀌자 마을 전체가 예수님을 배우게 되었고 제자들은 선교의 본질을 더 잘 깨달을 수 있었다.
관행
아이들은 자라면서 “왜”라고 묻는 때가 온다. 왜 이를 닦아야 해요? 왜 학교에 가야 해요? 이건 왜? 저건 또 왜? 수천 가지 질문이 쏟아진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성장 과정이다. 교회에서도 새로운 세대는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구세대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이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검토하도록 독려해야 하며 개인의 취향을 고수하거나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 ‘이 관행이나 일 처리 방식은 단순히 나 자신의 취향이고 늘 해 왔던 방식인가? 아니면 원칙인가?’라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
원칙
협상의 여지가 없는 문제도 있다. 정체성의 핵심이 되는 경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안식일, 성소, 재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등은 남은 백성을 구분 짓는 영원한 진리인데 우리는 습관적인 입맛대로 그 내용을 포장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분께서는 여전히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시다. 하늘로 가는 길에는 지름길도 없고, 입구는 하나이지만 우리의 여행은 각각 다를 수 있다.
공항에 착륙하여 들어선 거리는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난장판이 따로 없었지만 우리 차를 몰고 가는 운전기사에게는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자동차, 나귀, 자전거, 낙타, 트럭, 보행자가 함께 길을 차지했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경험은 다 달랐다.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차에서 우리는 열기와 먼지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걷는 것보다는 당나귀나 낙타를 타고 상대적인 편안함을 얻는 것이 더 낫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복잡한 도로를 이리저리 빠져나갈 수 있었다. 보행자들도 그 나름 용케도 길을 뚫고 나아갔다.
우리는 모두 길을 가고 있다. 사는 장소, 삶의 경험과 기회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냉방 차량을 이용하는 여행자가 있는가 하면, 더위와 먼지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길을 가면서 어떤 것이 취향, 관점, 편견, 관행, 원칙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것이 앞의 넷 중 하나라면, 자신의 시선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다. 삶과 교회의 중심에서 그분과 함께할 때 우리는 서로를 더욱 잘 받아들이고 더 자세히 살필 수 있다. 현자가 말했듯이 우리 모두에게는 결점이 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오드리 앤더슨 아일랜드 태생이며 트랜스-유럽지회 총무이다. 현재 영국 세인트 앨번스에 살고 있다.
발문
하늘로 가는 길에는 지름길도 없고, 입구는 하나이지만 우리의 여행은 각각 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