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을 세워 줄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예수님이 직접 모본을 보여 주셨다.
흙으로 아담의 몸을 완벽하게 만들었을 때의 기쁨을 회상하며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셨다. 이제는 아담의 살에서 떼어 낸 완벽한 여인 하와를 손가락에 사랑을 담아 만들고 계신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를 다른 피조물처럼 말로써만 존재하게 하고 싶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손수 만들고 싶으셨다. 그들의 마음에 자신의 형상을 심어 주어 그들을 사랑의 관계로 만들고자 하셨다. 그들은 동등하며 상호 보완적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자신들의 가족을, 모든 피조물을 돌봐야 했다(창 1:26~28).
하나님께 똑같이 소중한 우리는 나이, 성별, 인종 등의 차이에 상관없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축복하며 서로에게 겸손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힘이 되어 주도록 창조되었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학대하고 상처를 주고 통제할 권리가 없다.
수천 년 동안 자만심과 이기심으로 권력을 오용하면서 강제와 압박, 학대와 폭력을 선택한 사람이 많았다. 어린이, 여성, ‘왕따’, 기타 약한 이들 대부분이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주인과 종, 유대인과 비유대인,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형성된 파괴적인 힘의 불균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대부분은 자만심, 탐욕, 이기심, 폭력, 성욕에 이끌려 남에게 권력을 휘두른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타적이고 다정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그들 때문에 잘못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모본
영적·신체적·정서적·지적 능력을 오용한 이들로 망가진 이 땅에 예수께서 태어나셨다.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고자 그분이 오셨다. 문제를 바로잡고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짓밟힌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종의 마음으로 사는 법을 보여 주셨다. 그분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배어 있었다(갈 5:22~23).
간음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가 그분의 발 앞에 쓰레기 자루처럼 던져졌다. 그때 그분은 사람들의 비밀을 모래 위에 써 내려간 뒤 조심스럽게 지우면서 각 사람의 존엄성에 대해 존중을 나타내셨다. 그 여자를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며 그녀의 세계로 눈을 돌리신다. 진실로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난생처음 알았을 것이다.
한낮의 열기 속에 우물물을 긷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그분은 길을 떠나신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멸시했고 사마리아인은 그녀를 무시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를 판단하거나 유대인 남자인 자신의 위치를 남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약한 존재가 되기로 선택하시고 그녀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요청하신다. 자상한 위엄으로 자신을 대하는 그 남자를 보고 그 여인은 깜짝 놀란다. 심지어 그는 가장 깊은 비밀도 꿰뚫고 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도감을 느끼며 마을 전체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고 떠난다(요 4:1~42).
수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다. 그녀는 지치고 빈곤하고 억눌려 있었다.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무리 속으로 사라진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마음속 울부짖음과 손끝의 믿음을 알아채셨고 자신의 능력을 겸손하게 행사하신다. ‘내가 너를 고쳤다’고 말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신다(막 5:34). 그분께서는 그녀의 건강뿐 아니라 존엄성까지 회복하셨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동전 두 개를 넣고 급히 사라진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셨다. 그녀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음성으로 그분은 그녀의 신실한 너그러움을 높이 평가하신다. 걸어 나오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세상의 모든 돈을 모은 것보다 자신이 하나님께 더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시몬과 유다가 그녀에게 망신을 주고 모욕하자 예수께서 그들을 침묵시키신다. 그 교만한 태도와 언어폭력을 그분은 용인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냉소적인 말과는 정반대로 예수께서는 부드럽고 감동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공개적으로 마리아를 드높이시고 비난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신다. 우리가 그분의 모본을 공공연하게 따르기를 그분은 바라신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께서는 여자, 어린이, 문둥병자, 세리, 사마리아인을 존중하셨다.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사회가 그들을 무너뜨릴 때 그분은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다. 자신의 자녀를 깔보며 으스대는 태도를 그분은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약자를 위해 목청을 높이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신다. 심지어 아무도 자기를 편들지 않을 때라도 말이다. 우월감을 향한 사탄의 끊임없는 욕망으로 물든 세상이 균형을 되찾도록 하는 데 그분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신다.
잠언 31장에서는 현숙한 여인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가정이나 일터, 지역사회에서 앞장서서 상황을 주도한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존중받는다. 그녀는 맡은 일이 많은데도 아침 일찍 일어나 하인을 위해 음식을 준비할 정도로 겸손하고 배려심이 깊다. 여기에는 뒷이야기도 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존중하며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누군가 격려를 얻고 힘을 얻으면, 격려하는 사람에게도 격려를 받는 사람에게도 복이 되어 그들 주변의 지역사회 전체가 함께 복을 누린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대하는 예수님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자신의 능력을 오용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가 밀어 넘어뜨리는 사람들보다 우리는 더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과 남을 존중하는 그분의 모본을 따를 때 우리 모두는 힘을 얻게 되며 우리의 모든 관계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본래 목적에 더욱 가까워진다.
캐런 홀드퍼드 가족 치료 전문가이자 트랜스-유럽지회 가정봉사부장이다.
세워 주는 관계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평소의 태도를 되돌아보고 주변 사람을 세워 주는 방법을 찾아보자.
그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여길 수 있을까? 예수님처럼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변 사람들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나와 그들이 동등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예수님이라면 나를 세워 주시기 위해 무슨 말씀을 하시고 무엇을 하실까?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동료로, 사랑과 존경과 격려와 보호를 받아 마땅한 존재로 여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억눌린 이를 위해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
예수님은 여성을 존중하고 돌보는 일에 모본이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신문의 1면과 언론 매체에 성추행, 학대, 여성 비하에 관한 기사가 쏟아지는 시대이다.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예수께서 지금 이 시대에 오셨다면 공공장소에 서서 다음의 성경 말씀을 크게 낭독하셨을 것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창조의 토대
인류 존중에 대한 하나님의 기본 표현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던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설사 죄가 모든 인류에게 해를 끼쳤을지라도 여자 역시 남자처럼 하나님의 동일한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아담은 비록 먼저 창조되었지만 하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를 동등하게 여겼다(창 2:23). 하와를 창조하기 위해 아담에게서 갈비뼈를 취한 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과 존중을 나타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엡 5:28).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사랑하고 존중하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인류가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라신다. 물론 여자들도 스스로를 존중하면서 말이다. 죄가 들어온 뒤에도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
여성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존중은 그분의 삶과 사역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났다. 사실상 그것은 혁명에 가까웠다. 예수님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그리스-로마 문화와 동시대 유대 문화에서는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게 여겼다. 그분께서는 여성에 대하여 당시 전통적 관습과는 전혀 다른 태도와 관계를 보여 주셨다. 이를 언급하고 있는 성경의 많은 예 중에 몇 가지만 이야기해 보자.
존중과 애정 어린 보살핌
젊은 남자가 앞으로 자신의 아내를 어떻게 대할지 알고 싶으면 그가 어머니와 자매들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 보면 된다고 흔히들 말한다. 성경에 예수님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세 가지 사건에서 예수님과 어머니의 관계가 진솔하고 정중한 관계였음을 엿볼 수 있다.
부모들이 자신을 성전에 남겨 두고 떠났을 때 예수님은 랍비들과 토론을 하고 계셨다. 예수의 어머니는 왜 그러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셨다(눅 2:49). 이는 결코 무례하거나 버릇없는 대답이 아니다. 부모를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마리아는 그 대답에 불쾌해하지 않고 오히려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다(눅 2:51). 이 짧은 대화 후에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51절).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께 와서 손님을 위한 포도주가 부족하다고 알렸다.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에도 예수께서는 먼저 포도주를 제공하셨다. 성인이 된 아들에게 이러한 요청을 한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가 신뢰할 만하며 서로 존중하는 관계임을 암시한다.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여성을 향한 하늘의 태도를 확인시켜 주었다.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시면서 예수는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보며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하셨다(요 19:25~26). 예수께서는 마음속 깊이 어머니를 생각하셨다. 숨을 거두면서도 어머니의 안위를 당부하셨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께서도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에게 마리아는 어머니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딸이었고 그런 그녀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고 예수께서 존중하셨다.
문화 차이를 뛰어넘다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 사건 역시 그분이 여자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반문화적 사례이다. 그분께서는 대낮에 우물가에 앉아 편견이라는 문화적 장벽을 허물고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신다. 그러자 여자는 놀란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예수께서는 관습과 문화의 시선으로 여자를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눈길로 그녀를 보셨다. 그 여자의 삶에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들을 알아보셨고 그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인 생명의 물을 주셨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10절). 예수께서는 그녀를 학대하거나 괴롭히지 않으셨다. 그녀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높이고자 노력하셨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자 유다는 그 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썼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곧바로 마리아를 위해 변론하셨다.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요 12:7).
유대인 여자들이 축복 기도를 바라고자 아이들을 예수께로 데려왔을 때, 이를 반문화적인 행동으로 여긴 제자들이 그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이를 보신 예수께서는 가르침을 멈추시고는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마 19:14)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세대와 문화에 걸쳐 어린이와 여성의 가치를 분명히 확인시켜 주셨다.
궁극적인 사랑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께 끌고 왔다. 그녀와 간음을 저지른 남자를 붙잡아 오는 일은 자기들 편리한 대로 잊어버린 채 말이다. 예수께서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명령하셨으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 그 자리를 떠났다. 그분은 여자를 보시고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0~11)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간음을 용인하지 않으시는 한편 고소자들이 그 여자에게 가한 부당한 대우를 책망하셨다. 예수님은 문화적 관습에 맞서 여자들을 옹호하고 존중하셨다.
남녀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동등한 사랑과 존중의 궁극적인 표현은 십자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 여자를 과소평가하고 비난하거나 괴롭히고 학대하는 문화적 관습은 예수님의 정신에 어긋난다. 그분에게 통용되는 것은 사랑과 상호 존중이며 놀라운 은혜가 필요한 이들에게 이 모두는 값없이 주어진다.
제프리 G. 음브와나 탄자니아 출신이며 대총회 부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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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워크로 빚어낸 드림 팀
마을 전체에 축복을 안겨 준 마다가스카르 부부 이야기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TV로 뉴스를 검색하고 시청하다 보면 여성 폭력과 학대가 헤드라인 곳곳을 장식할 때가 종종 있다. 사실 이러한 일은 전 세계에서 매일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 동부 해안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의 어느 농부에게 이것은 단순히 듣고 기분이 상하는 걸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종인 그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을에서 여성과 가족들이 양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그는 아내와 함께 건강 돌보미로 활약하고 있다.
진(42)과 한타(37) 라사미아리소아는 매일 장시간 일하여 자급자족으로 일곱 자녀를 먹여 살리는 농부 부부이다. 그 나라 여인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한타는 집에선 아이를 돌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하고 옷을 짓는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자의 몫”이라고 아드라 마다가스카르의 미레일 라보닌자토보는 말한다. “하지만 마다가스카르 중남부에 있는 암피타나 지역에서 이들 내외는 한 팀이 되어 어머니와 자녀의 건강 생활과 위생 관리를 위해 앞장서고 있어요.”
한 팀이 되어
수년 동안 진과 한타의 마을은 폐렴, 설사, 영양실조가 기승을 부렸다. 암피타나 지역의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났다.
2014년, 아드라는 마다가스카르에서 미국 국제개발처가 후원하는 아소트라이(ASOTRY)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마다가스카르어로 ‘추수하다’는 뜻인 ASOTRY는 5개년 식량 안전 보장 프로그램이다. 아드라는 이 계획을 위해 암피타나 마을과 협력, 어머니 리더들을 임명하고 이들에게 건강 관리 특별 과정을 이수시켜 식량 증산과 재난 예방으로 영양실조에 맞서도록 했다. 여성들이 건강 관리자가 되도록 장려하여 어머니와 자녀의 건강을 촉진하고 유아 사망률과 어린이 성장 문제를 줄이는 게 아소트라이의 핵심 사업이다.
집중 훈련을 받은 리더들은 보살핌이 필요한 여성을 만나 자신이 배운 것을 전한다. 어머니 리더들은 또 여성의 가정을 방문하여 영양, 모유 수유, 산전 건강 관리, 개인 위생에 대해 교육을 실시한다.
ASOTRY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래로 2천여 여성이 어머니 리더가 되었고, 지역 여성 1만 6,000여 명이 혜택을 받았다.
“처음에 이 프로그램에 대해 듣고 한타와 진은 참여를 꺼렸어요.” 라보닌자토보가 말한다. “한타가 글을 읽지 못했거든요. 배우고 나서도 다른 여성들을 훈련하거나 알려 주지 못할까 봐 두 내외는 겁이 났던 거예요.”
하지만 한타가 어머니 리더가 되기를 바랐던 같은 지역 사람들은 한타에게 등록해야 한다고 격려하였다. 결국 부부는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한타는 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예상대로 처음에 한타는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훈련생들을 따라가려고 애를 썼다. 남편 진은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었고 소그룹 조직과 그녀가 방문할 여인들의 명단 작성을 도왔다. 두 사람은 교육 기간에 함께했고 유익하고 실용적인 정보를 얻었다.
이 모든 것을 바쁜 농장일과 대가족 양육과 병행했다. 때때로 진은 농사를 중단하고 아내를 데리고 지역 여성들을 찾아가 산전 관리, 위험 징후, 모유 수유 등에 대해 자신이 직접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
ASOTRY 프로그램이 시작된 이래 여성과 가족에게 더 나은 건강 관리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진과 한타를 비롯한 리더 여성들의 노력으로 수많은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은 아무 데서나 대소변을 보고, 비누로 손을 씻지도 않고, 아플 때 병원에 가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동네 사람들이 비누로 손을 씻고, 아플 때는 병원에 가요. 어떤 집에서는 화장실을 따로 마련하거나 함께 사용할 화장실을 다른 이웃들과 함께 만들기도 했어요.”
자신의 아이들이 건강 습관을 익힌 뒤로는 전처럼 자주 아프지 않는다는 걸 진과 한타는 느꼈다. “마을 사람들이 설사와 말라리아로 큰 고통을 받았는데 지금은 아내와 제가 가르친 교육으로 사람들이 예방법을 알게 되었어요.”
자신이 해낸 일을 뿌듯하게 여기는 한타는 앞으로도 어머니 리더로 봉사하려고 한다. “어머니 리더로 일하는 게 너무 즐거워요. 글을 몰라 중간에 그만둘 뻔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자원해서 저를 도와주었고 덕분에 계속해 나갈 수 있었어요. 남편이 있어서 이제는 활동에 아무 어려움이 없어요.”
ASOTRY에서는 한타가 등록했던 글 읽기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그녀의 읽기 실력은 점점 향상했고 어머니 리더로서 더 효과적인 봉사를 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한타는 지금도 마을에서 건강 교육을 실시한다.
“이 프로젝트에서 지식을 얻는 즐거움 때문에 아내와 함께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마을에서 일어난 여러 변화에 대해서도 감사하고요. 저는 우리 마을에서 다른 아버지들의 모본이 되고 싶어요.”
아드라는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 다른 지역에서 ASOTRY와 관련된 일을 계속 이어 나가고 있다. 라사미아리소아 내외와 같은 농가에서는 향상된 농기구와 장비를 접하고 저축, 대출 상품을 마을에 제공하면서 가축 치료 서비스 기회도 늘리고 있다. 남자, 여자, 어린이를 비롯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이 프로젝트에서 알려 줄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원하여 봉사하는 헌신적인 가정의 작은 도움을 통해서 말이다.
키미-루 제임스 아드라 인터내셔널 홍보 담당자이다. 아드라에 관한 더 많은 정보는 다음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adr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