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H. 라모스 메히아
프로테스탄트 진리의 전령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19세기 중반 이후 주로 북미 지역이 앞장서서 복음 전도를 지원한 덕택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재림 운동은 훨씬 이른 때에 다른 땅에도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하며 2018년은 그 200주년에 해당한다. 분실됐다고 여겨졌다가 최근에 다시 발견한 1818년의 원고에서 이 점을 확증해 준다. 원고의 기록자는 임박한 재림뿐 아니라 성경적인 안식일과 죽은 자의 무의식 상태를 믿었다.
밀러주의자들보다 이른 시간에
밀러주의 운동은 1840년대 미국에서 시작했고 이보다 앞서 1820년대 말에 유럽에서 재림 각성 운동이 있었다. 이 재림 각성 운동은 예수회 사제였던 마누엘 라쿤사(1731년 칠레 출생, 1801년 이탈리아에서 사망)가 저술한 서적 <영광과 위엄 속에 오시는 메시아(The Coming of the Messiah in Glory and Majesty)>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1790년대에 교황 국가 지역에서 추방되었다. 이 책에서는 성경적 재림이 천년기 후가 아니라 앞에 있다고 설명한다. 당시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는 세상의 모든 정부가 천년기의 평화와 번영 가운데 그리스도인 교회에 복종한 뒤에 재림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에드워드 어빙은 1825년에 라쿤사의 원고를 영어로 번역했고, 예언에 열심인 사람들이 영국 런던 근처 앨버리 파크의 집회 기간(1826~31) 동안 열심히 연구를 하였다. 그 문제에 대한 공개 토론이 여러 장소, 인쇄물, 서적을 통해 퍼져 갔다. 곧 복음주의 교회들이 천년기 전에 재림이 있다는 통찰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통적인 교회들은 지나치게 정부와 묶여 있어서, 재림의 전제 조건으로 온 세상의 회심이 필요하지 않으며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만 해도 된다는 라쿤사와 앨버리 파크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윌리엄 밀러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전천년 사상의 성경적인 기초를 확인한 후에 1816~18년에 자신의 전천년론을 확신했다. 영국의 재림 각성 운동의 반향이 북아메리카의 해안가에 이르렀을 때 밀러는 설교 초청을 받았고 북아메리카의 재림 운동이 시작되었다.
밀러는 19세기 북아메리카의 제칠일 안식일 재림 운동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였으나, 현재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상이했다. 밀러는 제칠일 안식일과 죽은 자의 무의식 상태를 거절했다. 그렇지만 1848~50년에 조지프 베이츠와 제임스 화잇이 이끄는 밀러주의자들은 성경의 안식일을 받아들였다. 또 다른 밀러주의 설교가 조지 스토스는 죽은 자의 무의식 상태에 관해서 그들에게 확신을 제공했다.
한편 남아메리카에서
그러나 남아메리카에서 베이츠와 화잇에 수십 년 앞서 다른 사람이 오늘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교리들을 총망라하는 내용을 설교했다. 프란시스코 H. 메히아(또는 멕시아, 1773~1828)가 아르헨티나의 가톨릭 신학원에서 교육을 받던 중 1816~17년경에 라쿤사의 서적을 접했다.
라모스 메히아는 라쿤사의 책에 전천년론뿐 아니라 죽은 자의 무의식 상태를 지지하는 풍성한 주석을 달았다. 1820년에 그는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토요일이 성경상의 안식일이라는 메시지를 지키고 전하는 일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학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간된 개신교 저널에 실린 1913년의 글을 통해 라모스 메히아의 저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그의 저술 중 어느 것도 얻지 못하다가 2016년에 그의 원고의 상당 부분이 익명으로 기부되었다. 다른 원고들은 로마 가톨릭에 저항하는 그의 견해를 싫어하는 후대 사람들이 제거하고 파기했다. 기부된 원고는 아르헨티나 리베르 플레이트 재림교회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라모스 메히아의 중요성
아르헨티나의 애국자 라모스 메히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의원으로 선출되었고(1810~1811) 목장 주인으로 일했다. 그는 지역 원주민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연방 정부와 맺은(그리고 번번이 위반한) 협정의 원주민 측 대표자로 직무를 이행했다. 원주민과 가까이 지내는 바람에 정부로부터 의심을 받았고 정부는 1821년에 그에게 인디언 구역에서 떠나라고 명령한 뒤 로스 타피알레스 지역의 다른 농장으로 보내어 죽을 때까지 감금했다(오늘날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도시 지역 라모스메히아시 근처).
라모스 메히아는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복음적인 관점을 지녔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프로테스탄트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특히 미사의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 한다는 가르침을 거절했고 그것을 우상 숭배로 정죄했다. 그는 “의인은 예수 앞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제사장이 되시며 그분에게 주권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교황이 예수의 대리자라는 교리는 “고대의 불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적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가? 요한계시록 13장 3절에 있다.”라면서 그는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라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라는 성경절을 언급했다.
라모스 메히아는 라쿤사의 저술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무덤 너머의 삶을 위한 자신의 소망을 오로지 부활에 두었다. “영혼을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사람과 그의 영혼은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창 3:19)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여, 후에 그것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인간에 대한 그의 개념은 매우 근대적이었다. “인간의 몸이 그저 흙이라면, 그의 영은 이성적인 생명을 위한 기관일 뿐이다. 왜냐하면 영과 생명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요 6:63).
라모스 메히아는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정교한 안식일 율법과 불협화음인 일요일 준수”를 대조했다. 일요일이 표면적으로는 안식일과 유사하지만(가인의 희생 제사처럼), 중요한 내적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아벨의 양이 하나님의 어린양을 예시하는 반면에 가인의 채소는 그저 “불협화음”일 뿐이었다. 진정한 쉼의 날로서의 토요일 준수가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어야만 한다.
북아메리카의 재림교인들은 라모스 메히아의 도움 없이 제칠일 안식일과 죽은 자의 무의식 상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의 저술들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 배경 속의 사람들이 인간 저자, 선교사들을 통하지 않더라도 성경에서 직접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독특한 신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 세상을 향한 하늘의 마지막 경고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계 14:6)에게 나아가야만 한다. 200년 전의 옛 스페인어 원고가 최근에 재발견된 것은 이 성경의 메시지를 멀리 그리고 널리, 긴급히 전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상기시켜 주는 섭리의 징조인 듯하다.
*특별한 언급이 없는 인용문은 다음에서 발췌했다. “Ramos Mejía, el primer adventistamoderno,” by Juan Carlos Priora in
아에시오 카이루스(Ph.D.) 필리핀 재림교회 국제대학원(AIIAS)의 교수 겸 프로그램 책임자로 일한 뒤 은퇴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로마린다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