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처가 필요한 어린이
빌 노트
기독교인 대부분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계절에 우리는 그 이면을 들여다본다. 온갖 따뜻하고 친근한 장면의 뒤를 잇는 이야기를 이제 꺼내야만 할 것 같다.
요셉과 마리아에 관한 오래된 성경 이야기의 한 장면을 나는 상상해 본다. 왕의 군사들이 현관을 마구 두드리는 사이에 두 사람은 아기를 데리고 뒷문으로 도망친다. 어쩌면 그렇게 긴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가족이라고 하기 어려운 특별한 세 사람이 마을 밖 수 킬로미터를 벗어나자 한밤중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마을을 흔들어 놓는다. 세 사람은 베들레헴의 비극을 모면했지만 슬픔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아기를 데리고 즉시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을 듣고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세상 누구나 아기를 좋아한다고 우리는 말하지만 이 아기는 태어난 지 며칠도 몇 달도 안 되어 벌써부터 멸시받고 거절당했다. 슬픔의 자식이었고 불행에 익숙한 아기였다. 사도 요한이 말했듯이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여관에는 그의 어머니가 묵을 방이 없었다. 그분을 위한 빈방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이 소중한 아기는 이방의 낯선 땅으로 목숨을 위해 도망쳐야 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이면에 담긴 어두움이다. 이것은 어쩌면 매년 연말에 떠올리는 세계 평화와 화합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대해 성경이 제시하는 해독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분의 탄생과 생애를 비참하게 하려는 악행이 전부 자행됐다. 그의 등장을 치욕스럽게 하려는 환경이 모두 갖추어졌다. 이 아기를 위협하기 위한 공포의 수단이 죄다 동원됐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온갖 고초 속에서도 우리 주님께서 자유 하게 하는 복음과 믿음과 신뢰와 평화를 알려 주셨다는 사실이 특히나 놀랍다.
무엇보다도 이 아기는 분명한 위험을 겪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이 있다. 위험에 처한 아기는 그분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공포와 고통과 전쟁과 굶주림을 피해 처절하게 도망치는 이들의 대열 속에 수백, 수십만 어린이가 포함되어 있다.
이번 달 <애드벤티스트 월드>에서 난민들의 곤경에 관한 특집 기사를 읽으면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작은 자들’이라고 하시는 이들의 모습에 담긴 그분의 얼굴, 여전히 사랑과 위로와 피난처를 찾으시는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