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는가
1,260년 예언의 이해
법적 관점으로 본 해결책
니콜라스 P. 밀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 7:25)의 예언 기간을 재림교회는 역사적으로 중세 시대를 관통하는 1,260년 기간에 해당한다고 이해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이 예언 기간이 언제 시작되고 마치는지에 대해 견해가 다양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일어나고 프랑스 장군 베르시에가 교황을 유배 감금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주석가들 사이에서 좀처럼 흔치 않게 예언에 대해 의견이 거의 일치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이 기간이 서기 1798년에 끝난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그 기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서기 538년에 출발점이 될 만한 사건이 무엇인가였다.1
하지만 1790년대 사건들로 인한 커다란 충격이 가라앉은 뒤 몇 학자들은 교황의 유배와 옥사에 견줄 만큼 뚜렷하고 결정적인 사건을 서기 538년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다니엘서 7장의 세 번째 뿔이 뽑히는 사건이 그 출발 신호라고 생각했다. 유스티아누스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538년에 오스트로고스를 물리친 사건이다.
문제는 결정적인 패퇴라고 말하기에는 사건의 결말이 실망스럽다는 점이다. 그 사건은 벨리사리우스가 오스트로고스의 로마 포위를 물리친 일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일은 최소 20년간 지속된 전쟁의 일부일 뿐이다. 오스트로고스는 540년대에 로마를 다시 점유했다가 철수했다. 오스트로고스가 완전히 물러난 것은 대략 553년이 지나서였다. 그렇다면 538년 전투가 540년대의 유사한 승리들 및 553년의 최종 전투보다 특별히 예언적으로 중요한 결정적인 부분은 무엇인가?2
분명한 답변이 부족하자 538년은 고유한 의미가 없으며 그저 1798년의 결정적인 끝마침에 관련된 편의성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일부 재림교인을 포함한 몇몇 학자는 1,260년 예언을 문자적·역사적으로 적용하는 데서 떠나서 상징적인 수로 보려는 방향으로 더 기울어졌다. 이런 방법론은 요한계시록의 다섯째 나팔과 여섯째 나팔의 예언 기간처럼 다른 예언 기간들도 그렇게 보게 하는 여지를 제공했다.
필자는 군사적인 사건보다는 법적 체제의 시작 내지는 붕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법적 관점은 이 예언 기간에, 어쩌면 다른 예언 기간을 위해서도 더 확고한 근거를 제공하리라고 믿는다.
전통적인 재림교회 방법론
초기 재림교인들은 그 예언을 역사주의자 전통에 따라 채택했기 때문에 예언 해석가 대부분은 1,260년의 시작 시기를 다니엘서 7장 8, 20, 24절에 나오는 작은 뿔이 세 뿔을 최종적으로 뿌리 뽑는 로마의 군사적 승리와 연관시켰다. 이런 관점은 유라이어 스미스의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그리고 다니엘서와 기타 성경에 관련한 <제칠일안식일재림교회 성경주석>, 기타 여러 저작에서 나타난다.
이런 흐름에 대한 중요한 예외는 엘렌 화잇이다. <각 시대의 대쟁투>에서 그녀는 간략히 진술한다. 6세기에 “로마의 감독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공포되었다. 이교는 그의 지위를 교황에게 넘겨주었다. 곧 용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계 13:2)를 주었다. 그리하여…1,260년에 이르는 교황권의 박해가 시작됐다(단 7:25).”3 여기서 화잇은 법적인 권위를 통해 권세를 넘겨주는 순간에 초점을 둔다.
그렇지만 몇 재림교회 학자는 1,260년을 일반적이고 심지어는 상징적인 기간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특정한 시작 및 종결의 때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는 데서 멀어지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 기간에 대해 관념적, 상징적 입장으로 나가는 경향으로 인해 요한계시록과 실제 역사는 단절되기 시작했다. 이런 방법론은 확실히 우리의 선구자들이나 <각 시대의 대쟁투>에서 엘렌 화잇이 보였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보는 방식일 것이다.
1,260년을 위한 법적 체계
다니엘서 7장 24~26절과 몇몇 관련 예언 구절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보면, 1,260년의 종결 시점의 결정적인 사건들이 군사적이기보다는 훨씬 더 법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얼개를 이해하고 거기에 적절한 비중을 두게 되면 538년 사건이 1798년 사건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가 더 명쾌해진다. 요컨대 서기 534년에 완성된 유스티아누스 법전은 “정통 기독교 세계를 법제화하고”, 교황을 기독교 세계의 공식적인 머리로 두어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명했으며”, 이단의 생사를 판가름할 세상 권력을 교회에 제공했다.4
그렇지만 이 법전이 합법적으로 공포되어 그 지역에 시행된 것은 538년, 즉 로마에 대한 포위 공격이 풀린 다음이었다. 유스티아누스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536년 말에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로마에 입성했지만 잠시 후에 오스트로고스가 와서 로마를 포위했다. 약 1년 뒤 포위 공격을 물리치고 벨리사리우스는 로마와 그 인근을 통제했다.5 교황권을 높이는 그 법전의 조항들이 벨리사리우스에 의해서 로마의 경계를 넘어 실제로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고스 전쟁은 계속되어 마침내 553년 오스트로고스는 쫓겨났다.6
그러나 이후의 전투와 포위 공격들이 538년에 자리 잡은 교황 중심의 법 체제를 물리지는 못했다. 로마가 고스에 의해 다시 함락되었을 때조차, 교황권이 이미 로마 밖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기에 그들은 교황의 통치를 마음대로 건드리지 못했다. 재림교회 학자 장 주코우스키는 “538년 이후에 교황권은 결코 오스트로고스의 왕들의 통제 아래에 들어가지 않았다.”7라고 진술했다. 유스티아누스 법전을 통해 그리스도교 세계의 맨 위에 올라가서 이단에 대한 생사권을 제공받은 교황 체제는 1,000년 넘게 서방 세계에서 지속되면서 11~12세기에 법적인 국면에서 혁명적인 신장을 이루었고 많은 현대 국가의 법 형성에 발판을 제공했다.8 그 법전과 그것의 종교적인 특성이 명시적으로 거부된 것은 18~19세기 세속 혁명 이후가 되어서였다.
이 세속 혁명은 1798년, 곧 베르시에가 교황을 사로잡아 유배하게 한, 프랑스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유배와 감금이라는 군사적·정치적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 중심적인 유스티아누스 법전을 세속적인 나폴레옹 법전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 세속 법전은 1798년 2월 15일, 유명한 8조 법안에 의해 실행되었다. 거기서 베르시에 장군은 로마가 독립적인 공화국이며 “그런 결과로 인해 교황의 옛 정부에서 다른 모든 세속 권력이 나오는 일은 금지되고 교황권은 그 일에 더 이상 어떤 역할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9라고 선포했다.
군사적인 면보다는 법적인 면에 초점을 두는 일은 1,260년 기간에 관한 주변 성경절들을 통해 정당화되며 심지어 곧 필요한 일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세 뿔을 뿌리 뽑는 것이 분명히 작은 뿔의 등장과 관련이 있고 연결되기도 하지만, 성경 본문은 1,260년 예언의 시점에서 군사적인 면이 결정적이라고 강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니엘 7장 25절이 핵심인데 그 구절은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낸다.”라고 말한다. 기간과 관련 있는 핵심 시점은 작은 뿔이 정복하거나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뿔이 분명한 권위와 통치권을 부여받는 데 초점이 있다. 이것은 다른 존재가 권위를 부여하는 법적 행위에 의해 가장 잘 성취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유스티아누스 법전을 통해 일어난 일이다.
그렇게 법적·교회적·군사적 사건의 조합으로 로마 교회에 권위가 주어졌다. 고스족은 536년 이전에 그리고 벨리사리우스가 도착하기 이전 로마를 지배했다. 고스 왕 테오다하드는 실베리우스 교황을 택했다. 유스티아누스는 로마인 집사 비길리우스를 교황으로 꼭 집어서 택했다. 537년, 벨리사리우스는 실베리우스 교황을 유배 보내어 결국 죽게 했으며 그 대신 비길리우스를 세웠다. 교황 비길리우스는 유스티아누스와 그의 새 법전에 의심의 여지 없이 충성한 첫 번째 교황이며, 538년에 그 법전은 처음으로 중대한 효력을 발휘했다.10
1,260년 기간의 시작점에 한 교황이 유배되고 새로운 법전(유스티아누스 법전-로마 교회를 높여 공식적, 법적으로 우선하는 권리를 주는 법전)의 보호 아래 황제가 꼭 집어 선택한 교황으로 교체한 사건과 종결점에 한 교황이 황제에 의해 유배되고 종교적인 법전을 세속적인 법전(나폴레옹 법전, 즉 교회에 특별한 위치를 제공한다는 생각을 거부한 세속 체제)으로 교체한 사건 간에는 명백한 평행 대칭이 존재한다.
결론: 법적인 면에 맞춘 초점
교회와 국가 관계의 역사는 예언을 이해하는 데 아주 많은 도움을 준다. 세 뿔이 뽑히는 일은 470~55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역사적 과정이다. 그러나 법 제정은 역사적 전개와 관련해서 더 정확한 시간 경계선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이 종종 예언에서 역사적인 기간을 다룰 때 법 제정에 초점을 맞춘다고 나는 믿는다. 법적 프리즘을 통해 볼 때에 538년 사건과 1798년 사건은 참된 시작과 끝의 대칭점에 서 있다.
예언 해석의 법적인 관점을 고려하는 일은 군사적 사건과 전쟁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이 관련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법적 정치 체제의 시작과 끝을 통해 이 사건들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데 더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더 통일성 있고 역사적 근거가 있으며 실제 세계와 관련된 예언 해석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성경과 하나님이 힘과 압제에는 별 관심이 없고 사랑과 권력이라는 대조적인 두 원리에 기초한 정부 형태들을 공개하는 데 더 관심이 있음을 적절하게 보여 주는 해석 원칙과 초점이 아니겠는가?
1. Ernest R. Sandeen,
2. See Will Durant,
3. Ellen G. White,
4. Durant, p. 112
5. Ibid., p. 109
6. 앞의 책, 111
7. Jean Carlos Zukowski, “The Role and Status of the Catholic Church in the Church-State Relationship Within the Roman Empire from A.D. 306 to 814” (PhD diss., Andrews University, 2009), p. 160
8. 앞의 책, 114
9.
10. 유스티아누스 법전 아래에서 비길리우스의 통치 원년은 538년이었을 것이다. 그의 실제적인 통치는 538년의 포위가 풀린 다음에 효력을 발했다. Zukowski, p. 160
다음 사이트에서 ‘무엇을 믿는가’에 관하여 더 많은 내용을 참조할 수 있다. www.adventist.org/en/beliefs/
니콜라스 P. 밀러 미국 미시간주 베리언스프링스에 있는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이다.
발문
법적·교회적·군사적 사건의 조합으로 로마 교회에 권위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