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묵상
예루살렘의 마지막 앉은뱅이
예수님에게 치유받은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니엘 보스케드
절호의 기회를 놓친 적이 있는가? 자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때 자기만 빠졌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다음의 성경 이야기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사도행전 3장에 등장하는 앉은뱅이 이야기이다.
독자들이 알다시피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고 나이는 40여 세였다(행 4:22). 그는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면서 앉아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에 그를 치유하지 않으셨다. 그는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치유를 받지 못한 마지막 무리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연관성?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복음서에 나오는 ‘베데스다’라는 못에서 나음을 얻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요 5:2~9). 38년간 병자였던 그를 예수께서 유심히 지켜보셨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고 명하시며 그를 치유하셨다.
예수께서 먼저 그에게 다가가셨다는 점이 여기서 중요하다. 보통 병자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예수께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대신해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베데스다에 있는 여러 병자 중(3절에 따르면 많았다.) 예수께서 직접 그를 선택하셨다.
나는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와 사도행전 3장의 이야기가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베데스다는 예루살렘 도시에 있었고 요한복음 5장의 중풍병자는 38년 동안 병을 앓았다. 사도행전의 앉은뱅이도 그만한 기간을 병자로 보냈다. 예수님의 죽음 직후 그의 나이가 40여 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의 치유 사건 당시 그는 38세 정도 되었을 것이고 결국 두 사람이 병으로 고통 받은 기간은 비슷하였다. 사도행전의 앉은뱅이도 베데스다에 있던 수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3절) 사이에 있었을지 모른다. 가능한 이야기다.
베데스다를 지나 중풍병자에게 다가가실 때 예수님은 다른 병자들, 아마도 다른 마비 환자들을 지나치셨을 것이다. 그들의 침상 곁을 지나시면서 그들의 외침을 들었지만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셨다? 왜?
예수께서 그날 더 많은 사람을 치유하고 싶었다고 엘렌 화잇은 진술한다.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무리가 경배하기 위하여 성전에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치료 행위가 유대인들의 편견을 자극시켜서 자신의 사업이 가로막힐 수 있음을 아셨다.”1
예수님의 행동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었다. 죄다 치료해 주었다가는 하나님의 사업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다른 병자가 아니라 중풍병자를 택하셨을까?
그가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엘렌 화잇은 설명했다.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그의 집요한 노력과 근심과 계속적인 실망은 그의 남은 기력을 신속히 빼앗아 가고 있었다.”2
그 병자는 포기 직전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그 모든 사정을 아시고 그를 택하신 것이다.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에 나오는 두 병자는 서로 아는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들은 서로 다시 만났을 수도 있다. 그들의 대화를 상상해 볼 수 있겠는가?
“당신, 지금 걷고 있는 거요?”
“그렇소. 예수님이 고쳐 주셨소!”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오?”
“모르겠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베데스다에 계셨는데.”
그 순간 상대방 앉은뱅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팠던 지인이 치유되어 기뻤을까? 자신도 더욱 간절히 치유받고 싶어 졌을까? 아마도 그는 베데스다에서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한꺼번에 여러 기적을 행하신 일어 두 번 정도 있었다. 한 번은 사역 초기요(요 2장), 다른 한 번은 사역 마지막 시기(마 21장)였다.
엘렌 화잇은 첫 번째 경우와 관련하여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신 뒤 그에게 나아온 병자를 돌보시며 그곳에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모두가 보살핌을 받았다. 사람들은 어떤 병을 지녔든지 다 나았다.”3 두 번째는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신” 일이다(마 21:14). 엘렌 화잇이 덧붙인 진술에 따르면 “성전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놀라운 장면에 몸이 얼어붙었다. 눈앞에서 병자가 낫고 맹인이 시력을 회복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기뻐 뛰었다.”4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을 전부 고쳐 주셨다. 하지만 우리의 친구는 그들 중에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을 그는 맛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기회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앞장서서 만나셨다. 그분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셨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4). 또 가나안 여자를 찾아가셨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마 15:21). 가다라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도 찾아가셨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막 5:1).
복음서에 나타난 치유의 유형은 적어도 세 가지이다. (1) 예수께로 다가와서 치유받은 사람들이다. (2) 다가올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대신 도움을 청하는 이들, 예를 들어 지붕으로 끌어 올린 중풍병자의 경우다(막 2장). (3) 예수님을 찾아낸 사람들이다.
흥미롭게도 앉은뱅이는 셋 중 어떤 유형에도 들지 않았다. 보통 예수께서 한 도시를 거쳐 가시면 그곳에는 아픈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병자와 예수님의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엘렌 화잇은 이 병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불행한 사람은 고침을 받고자 오랫동안 예수를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거의 가망이 없었고, 또 위대하신 의원이 활동하시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5 그의 소망은 절망적이고 결실이 없었다. 예수께서 그를 찾지 않으셨고 그도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고 그를 예수께로 데려가 주는 사람도 없었다.
엘렌 화잇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그의 마지막 노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침내 그의 호소로 친구들이 그를 성전 문에 데려다주었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희망의 핵심이었던 그분이 잔인하게 처형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6
그의 기분이 어땠을까? 그는 울부짖었을 것이다. “주여! 모두 치유받았는데 왜 저만 그렇지 못한 겁니까!”
40년 동안 걷지 못하고 40년 동안 꿈을 이루지 못하고 40년 동안 치유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마침내 예수님께 다가갔을 때 그분이 죽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우리의 친구는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그는 자신이 결코 고침 받을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눈물을 훔치며 그는 생각했다. ‘최소한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는 말아야지. 아직 구걸은 할 수 있잖아. 남은 인생 그거라도 하면서 살아야지.’
“나를 성전에 데려다주겠나?” 그는 아마 친구들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 이야기를 읽으면 모든 것이 이해된다. 그는 매일 성전 문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그는 “구걸”하였다(행 3:3).
그렇다. 그는 더 이상 기적을 구하지 않고 생존만을 구했다.
더 좋은 일
그런데 베드로가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5~6절).
그 말은 최후의 일격과도 같았다. 짓궂은 농담이었다.
하지만 나는 앉은뱅이와 베드로의 대화를 상상해 보면 즐겁다. “당신이 기대하는 것은 저에게 없어요. 저는 시간 여행자거든요. 저는 당신의 꿈을 상기시키려고 여기 있는 거예요. 당신이 갈망해 왔던 것을 주려고 왔어요. 나사렛 예수에게서 말미암는 것을 당신에게 주려고요.”
엘렌 화잇은 설명한다. “베드로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앉은뱅이의 얼굴에 낙담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사도가 계속하여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하자 그의 얼굴은 희망으로 빛났다.”7
뭐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말인가?
“베드로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행 3:7~9).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
모두를 치유하시는 하나님
독자들이 현재 어떤 처지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 여러분은 오래전 베데스다에서 고침을 받았을지 모른다. 예수님을 거기서 만나 즉시 치료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찾아다녔을 수도 있다.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에게 갔거나 착한 친구들이 대신 간청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를 지나쳐 버렸다는 부인할 수 없는 상실감에 깨진 꿈을 안고 성전 문에 앉은 처지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나를 잊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풍병자처럼 말이다.
그럴지라도 여러분의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다 헤아릴 수도, 측량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우리의 기대치가 가장 낮을 때 하나님의 기별꾼이 우리 삶에 찾아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명한다.
우리는 이 앉은뱅이와 같은 사람을 매일 만난다. 성전 문에서 무기력하게 꿈도 없이 그들은 더 이상 기적을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기를 잊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우리의 사명은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한 가지 약속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믿어요. 왜냐하면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곳,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대 또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할 테니까요.”
1 <시대의 소망 > 201~202
2 앞의 책, 202
3 앞의 책, 163
4 앞의 책. 592
5 <사도행적> 57
6 앞의 책, 57~58
7 앞의 책, 58
다니엘 보스케드(Ph.D.) 아르헨티나 엔트레리오스의 리베르타도로 산마르틴에 있는 리베르플라테대학에서 신약학을 가르치고 있다.
발문
그는 더 이상 기적을 구하지 않고 생존만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