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는 우리 것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정복자로 만드신다
레슬리 N. 폴라드
앨라배마주에 있는 우리 집은 자연보호구역 근처에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 때문에 미국 정부는 지역 생태계를 위해 서식지 보호구역을 지정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정원에 여름 과일인 수박과 멜론의 일종인 캔털루프를 심기로 했다. 당시 2살이었던 손녀 제네시스가 이 할아버지와 과일을 먹으며 소중한 추억으로 여기길 기대하면서.
그날 오후 나는 대총회 연례 회의 참석차 비행기를 타야 했던 터라 아내는 내게 이렇게 제안했다. “옷상자들을 잡초 위에 올려놓는 건 어때요? 당신이 돌아올 때쯤, 잡초가 죽어 뽑아내기가 더 쉬울 것 같은데요.” 그래서 나는 큰 옷상자 4개를 들고 와서 잡초 위에 올려놓았다.
일주일 뒤, 햇빛, 비, 바람 없이 잡초가 어떻게 되었는지 볼까 하여 첫 번째 상자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길이가 80센티미터 정도인 큰 뱀이 보였다. 설치류 포식자이나 독이 없는 왕뱀인 것 같았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 ‘좀 더 확인해 봐!’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너비 10센티미터, 두께 1.2센티미터, 길이 120센티미터인 판자를 집어 들었다. 뱀에게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판으로 다가가자 뱀은 공격 자세로 똬리를 틀고는 판자를 쳤다. 내가 다시 같은 행동을 취하자 뱀이 다시 판자를 쳤다. 뱀이 세 번째로 공격할 때 입이 눈처럼 하얗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독사의 일종인 코튼마우스였다.
곧바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뱀을 거기에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손녀 제네시스가 맨발로 마당에서 노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 독사가 아무 잘못 없는 손녀를 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길이 120센티미터 판자를 손에 들고 뱀의 머리 위를 겨냥했다. 그러고는 마치 해머를 휘두르듯 뱀의 머리를 내리쳤다.
최초의 침입자
에덴이라 불리는 정원에 뱀 한 마리가 있었다. 그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친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공격을 가했다. 마귀 곧 사탄이라고 하는 옛 뱀의 공격은 우주에 죄의 독을 퍼뜨려 우리 첫 조상의 마음과 정신을 위험에 빠뜨렸다(계 12:7).
죄는 모든 것을 죽인다. 가정을 죽이고 결혼을 죽이고 관계를 죽인다. 그리고 평화를 죽인다.
그러나 죄가 죽인다는 사실을 인간 가족은 믿지 않았다. 4천 년 동안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우리는 인간적인 희생을 바쳤다. 기도했고, 눈물을 흘렸고, 기념비를 세웠고, 제단을 쌓았다. 4천 년 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다 허사였다.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 우리를 구원코자 하셨다(갈 4:4). 그분의 피는 십자가에서 공급된 해독제이다. 그분은 십자가, 자신과 우리의 십자가를 지셨고 자기의 피를 드렸다. 십자가에서 승리자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내리쳤다.
사탄은 패배했다. 악의 세력은 깨졌다. 지구라는 행성의 권리증서가 되돌아왔다. 만약 재림교회의 종말론이 이러한 승리를 알리지 못한다면 성경적인 합격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종말론이란 일간지의 주요 뉴스를 성경절에 연결하거나 최신 사건을 역사 시간표에 대입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들도 적절한 역할이 있지만 말이다.
종말론, 즉 마지막 때의 사건들에 대한 연구는 묵시적 짐승들의 포효로 청중을 두려움에 떨게 하거나 교황의 음모에 대한 억측을 초래하거나 타 교파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재림교회의 종말론은 승리를 밝혀내고 있다.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 그분의 승리다.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승리가 우리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핵심이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원수의 패배를 선언한다.
묵시록에서 사탄은 늘 패배자로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12장 7~8절에 따르면 그는 하늘에서 전쟁을 시작하지만 패한다.
요한계시록 12장 14절에서 그는 태양을 옷 입은 여자를 박해한다. “그러나 땅이 여자를 도와” 사탄은 다시 패한다(16절).
요한계시록 12장 13절에서 사탄은 남자를 낳은 여자를 공격한다. 그리고 또 패한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에서 사탄은 두 세력, 즉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동맹하여 남은 자손을 상대로 세 갈래 전쟁을 벌인다. 성도들은 막강한 삼중 연합의 세력과 맞닥뜨린다. 그러나 그다음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서 성도들은 승리하여 시온산에 서 있다.
성도들이 완벽해서 승리를 거두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승리에 힘입어 승리자가 되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계 12:11). 어린양은 승리하고 대적은 패한다. 사탄이 승리하는 듯한 상황(계 11:7; 13:7)은 두 증인과 성도들에게 일시적인 장해에 불과하다. 십자가에서 사탄이 명백하게 얻은 승리가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부활의 권세 아래서 무너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재림교회 종말론은 승리를 밝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재림교회는 다음 유명한 찬미 가사처럼 종말론을 선포해야 한다.
“아버지의 세계라
나 잊지 않으리
악한 자 비록 강하나
주 다스리시네”*
어린양이 얻은 승리를 그려 보라. 그는 일찍이 죽임을 당했던 것 같은 모양으로 서 계신다(계 5장). 앞서 갈보리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유배당한 선지자는 “누가 합당하냐?”는 쩌렁쩌렁한 질문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절망했다.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았다. 참담한 절망감이 요한에게 몰려왔다. 합당한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구원은 물 건너간 일인 것이다.
그 순간 장로 중 하나가 와서 말한다. “요한, 울음을 그쳐라. 합당한 존재가 계시다.”
예수님은 합당하시다. 아담이 비틀거린 곳에 그분이 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합당하시다. 아담이 엎어진 곳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합당하시다. 아담이 빗디딘 길을 당당히 지나가셨기 때문이다. 재림 기별을 이렇게 선포하자. “그리스도는 합당하시다.”
아담이 발을 헛디딘 곳에 서 계셨던 예수님이 합당하다. 아담이 떨어졌던 곳에서 올라오셨던 예수님이 합당하다. 아담의 실수를 통해 나아가셨던 그분께서 합당하다. 재림 기별을 이렇게 선포하자. “그리스도께서 합당하시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또 다른 승리의 모습을 살펴보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1~16).
그리스도께서 피 뿌린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신다. 이 승리가 다음의 예언과 관련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 그 장면은 훨씬 힘이 넘친다.
“에돔에서…붉은 옷을 입고…오는 이 누구냐”(사 63:1). 이사야는 이렇게 묻고 나서 또 말한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2절).
이어 대답이 뒤따른다.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노라”(3절, 킹흠정).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타락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필요했던 피 흘림을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19장의 예수님은 더 이상 상처 입고 피 흘리는 갈보리의 어린양이 아니다. 그분은 유다 지파의 사자로 오신다.
이사야서에 묘사된 붉은 군사의 이미지는 요한계시록 19장 11절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피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승리에 대한 약속이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말이라”(킹흠정). 승리의 상징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말 탄 자의 이미지는 매우 강렬하다.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말은 복음과 함께 신속히 달려오는 백마이며(계 6:2) 19장에 나오는 마지막 말 역시 백마이다. 승리로 시작한 복음은 승리로 끝난다. 영광으로 시작한 복음이 영광으로 끝난다. 계시록의 주제는 승리이다. 그분을 물리치기 위해 배치된 모든 세력에 대한 그분의 승리인 것이다.
“그 이름은 충신”이라는 구절을 나는 좋아한다(계 19:11). 더없이 좋은 시절에도 우리는 흔들린다. 그러나 그분은 이름으로 보나 성품으로 보나 신실하시다. 우리는 드문드문 충성한다. 그러나 기쁜 소식이 복음에 담겨 있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는 보증 수표다.
사탄은 고소한다. “그들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 문제라면 내 아들에게 가 봐.”
피에 젖은 옷
요한은 계속해서 붉게 물든 군사에 관한 이사야의 이상을 언급한다. 요한은 에돔에서 나오는 자가 입고 있는 붉은 옷을 본다. 그런데 붉게 얼룩진 승리가 이제는 그를 온통 감싸고 있다.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13절, 킹흠정). 그분은 희생자가 아니다. 그분은 승리자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이루어진 흰옷에 대해 많이 설교하지만 나는 그분의 붉은 옷에 담긴 승리의 의미를 깨닫고 매우 기뻤다. 이 마지막 계시에서 그분은 정의를 확립하러 오신다. 세상은 불의하다. 무고한 자를 죽인다. ‘타인’을 평가한다. 합당한 자를 배제하고 천박한 자를 택한다. 경제적 착취, 성매매, 성차별, 종교 박해, 계층 간의 따돌림 등 세상의 제도는 불의하다.
백마를 탄 자는 우리에게 모든 부패한 적대 세력이 파괴될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남은 백성은 구원받을 것이며 의는 영원히 확립될 것이다.
승리의 붉은 옷에 대한 다음의 관찰과 함께 결론을 맺고자 한다.
1. 요한계시록 19장에는 구절 간의 상호 관계와 암시가 나타난다. 성경에서 피에 젖은 또 다른 옷은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요셉의 옷이다. 여기서는 나이 많은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피로 적셨다. 그와 반대로 피에 젖은 예수님의 옷은 승리의 투명성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완전히 투명하게 싸우셨다. 그분께는 간사한 속임수가 없었다. 그분의 승리에는 진실성이 있다. 그분은 충성되고 진실하시다. 그런 그분의 피로 물든 옷이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신다.
2. 이 피로 물든 옷은 그분이 이룬 승리의 독자성을 나타낸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빛나는 영광의 군대가 백마를 탄 진홍색의 전사를 수행한다. 진홍 핏빛 옷을 걸친 하늘의 붉은 사령관이 흰 영광의 물결을 이끈다. 그런데 그의 군대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다(14절). 그들에게는 한 방울의 전혈(戰血)도 묻지 않았다. 어째서 하늘 기병대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는 것인가? 싸움터에서는 아무도 흰옷을 입지 않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분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가 아닌 그분의 승리이다.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그분의 싸움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그분의 옷이 피로 물들어 있고 군대의 옷들이 흰색인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싸움이 주님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보호하고 인도하기에 아주 충분히 능한 분이시다. 마치 나 말고 괜찮은 재림교인은 없다는 듯이 웹사이트에 돌아다니며 손가락질하고 익명으로 비난하는 일을 그만두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올곧은 증언일까? 아니면 “불로 연단한 금을 사”도록 하는 요한계시록이야 말로 참된 증인이신 분에 대한 올곧은 증언일까?
3. 피로 물든 그분의 옷은 그분의 완전한 승리를 가리킨다. 그분의 피로 물든 옷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분은 “많은 면류관”을 쓰고 계신다. 따라서 승리의 붉은 옷은 우주를 통치할 그분의 권리를 상징한다. 언젠가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 14:11). 이 피로 물든 옷은 ‘그분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이제 각자 있는 곳에서 우리 학생들, 기관, 교회, 지역 사회가 그분을 찬양하도록 이끌자. 모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에게 종말론은 승리이기 때문이다.
레슬리 폴라드(Ph.D, D.Min, M.B.A) 오크우드대학 총장이다. 묵시 문학 전공 신약학자이다.
* 찬미가 ‘참 아름다워라’의 영문 가사. 한국어판으로는 번역되지 않은 부분이다.
발문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말은 복음과 함께 신속히 달려오는 백마이며(계 6:2) 19장에 나오는 마지막 말 역시 백마이다. 승리로 시작한 복음은 승리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