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오솔길
감당할 수 없는 빚과 놀라운 탕감
조닌 윌슨
용서할 줄 모르는 종(마 18:21~35)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흥미롭다. 또 재미있는 반전도 담겨 있다. 이 비유는 어느 관대한 주인이 갑자기 자신의 용서를 철회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종이 빚진 금액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게다가 주인은 그의 용서를 철회한 것이 아니다. 다른 뭔가를 하고 있었다.
용서에 관한 질문
어느 날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를 쳐다보셨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가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관대함에 스스로 감동하며 불쑥 말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예수께서 답하셨다.
충격적인 답변이었다. 트집 잡기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용서를 세 번까지로 제한했다.1 베드로가 그 이상을 말했지만,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상상을 완전히 넘어서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 이야기로 짐작건대, 천국은 무한히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일백 번을 말했다면 예수께서는 일억 번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빚
한 주인이 자신의 종들과 함께 장부를 훑어보고 있다. 채무자의 엄청난 부채 기록에 그의 시선이 멈춘다. 빚진 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자 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14~28절에서 또 다른 비유로 더욱 상세한 전후 사정을 설명하신다. 당시 주인들은 종들을 엄선하여 그들의 능력에 따라 금 달란트를 맡겼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한 달란트는 보통 무게가 34킬로그램 정도였고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미화로 137만 달러(약 15억 원)다. 종들은 받은 달란트를 현명하게 투자해서 이자와 함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주인의 돈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없거나 혹은 그렇게 하지 않은 종들은 쫓겨났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종은 주인에게 금 1만 달란트, 즉 34만 킬로그램을 빚졌다. 오늘날 미화로 약 137억 달러(약 15조 원)에 달한다. 그 종에 대한 주인의 신뢰가 무한했던 것 같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다. 그 종이 그 모든 돈을 다 써 버렸다는 점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 엄청난 금액을 흥청망청 써 버릴 수 있을까?
상황을 파악한 주인은 가장 합당한 선택으로 그 종과 그의 가족, 그의 재산 전부를 팔아 빚을 갚으라고 했다. 그 종에게 상당히 많은 자녀와 재산이 있으리라 누구나 추측할 수 있다. 주인은 분명 그 종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그 돈을 써 버렸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종은 곧바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그것은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
“제가 빚을 모두 갚겠습니다.”
‘옳은’ 말이지만 빚을 다 갚으려면 매일 노동을 해도 20만 년이나 걸린다. 평균 수명으로 3천 번도 더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충격적인 은혜
주인은 말 그대로 충격적인 선택을 한다. 그 종이 결코 자신의 돈을 갚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 준다. 그가 진 빚도 전부 탕감해 준다. 장부의 잔액은 이제 0원이 되었다. 주인은 금 1만 달란트를 손해 보았다.
종이 파면되었다는 암시는 없다. 그는 여전히 주인 집안의 구성원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훨씬 경미한 금전 문제로도 해고당한다. 하지만 비유 속의 종은 여전히 자신의 가족과 함께할 수 있었다. 주인은 그의 재산을 팔아 치우지도 않았다. 그가 빚에서 놓였다고 주인은 선언했다.
재빠른 소송
주인이 베푼 은혜에 그 종은 기뻐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자축과 동시에 동료 종의 목을 조르며 자신에게 진 모든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동료 종은 그에게 겨우 1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있었는데 이는 약 100일간의 임금으로, 그가 졌던 빚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료 종이 자비를 구한다. 모든 빚을 갚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자비는 없다. 그는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그 바람에 그 동료가 빚을 갚기 위해 돈 버는 일이 불가능해졌다고 주석가들은 지적한다. 이 얼마나 심한 처사인가? 동료 종에게 가한 가혹한 처벌은 사실 그 자신이 응당 받아야 했던 형벌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스스로가 입증한 셈이다.
그의 잔혹함에 너무 소름이 끼치고 화가 나서 다른 종들은 곧바로 주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세세하게 보고한다. 이제 주인도 분노한다. 노발대발했을 게 틀림없다. 자신의 관용을 그 종이 어떻게 취급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른 종들은 분명 그 종의 행동에 주인이 분노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여기서 주인의 품성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기 종들의 행복을 신경 쓰는 사람인 것이다.
한량없는 관용
비슷한 짓을 했던 다른 종들은 일말의 경고도 없이 절단 나 버렸다(눅 12:46). 하지만 주인은 그의 종을 불러들였다.
“나는 너의 간청을 듣고 너를 용서했다.” 주인은 소리친다. “너도 너의 동료를 용서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는 묻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대화다. 그 종에게 설명할 기회를 준 것이다. 하지만 종은 한마디 대답도 없다. 우주를 선물로 받고서도 누군가에게 당장 소금 한 알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행동에 무슨 변명을 댈 수 있겠는가? 그 종은 용서조차 구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좋다.” 주인은 결국 그를 포기한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서 고생하게 하라.”
그 종이 평생 감옥에 썩고 싶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참고로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종뿐이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아니다. 그의 재산도 처분되지 않는다. 주인은 법적 최고형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 종은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렸다. 그렇다. 그가 요구한 것이다. 그가 사면을 거절했다. 아마도 자신의 빚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조차 못했을 것이다.
“모든 용서는 공로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엘렌 화잇은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 것으로 삼았는지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 증명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고 말씀하시는 것이다.”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고를 내리셨다.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릴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1 엘렌 G. 화잇, <실물교훈> 243
2 앞의 책, 251
조닌 윌슨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병원 근무, 교회 시청각부서 봉사 활동 이외의 시간에는 문서 전도에 참여한다.
발문
우주를 선물로 받고서도 누군가에게 소금 한 알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행동에 무슨 변명을 댈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