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발자취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익숙한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선교라면
플로렌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페르시아(오늘날의 이란)의 마라가에 있는 그들의 이층 흙집은 지역 기준으로 볼 때 매우 멋졌다. 조그만 부엌에 있는 창문을 통해 남실바람이 불어왔다. 일층은 모임을 갖기에 완벽한 공간이었다. 이층에는 방 두 칸, 즉 거실과 침실이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진흙 바닥과 벽을 계속해서 깨끗이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의아했다. 고향과 가족이 떠오르자 그녀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녀는 여기서 외로웠다. 정말 외로웠다.
그녀의 남편 프랭크 오스터는 선교사 생활에 익숙했고 이미 4년간 선교지에서 살았다. 플로렌스는 첫 만남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들은 미국 왈라왈라대학교의 해리 워시번 교수가 조직한 외국 선교 모임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외국 선교사가 되겠다고 그들은 각각 맹세했다. 둘 사이에 잠시 우정이 꽃피었고 프랭크는 1909년에 선교사가 되어 떠났다.
1901년 대총회 이후에 일어난 해외 선교의 새로운 비전으로 해외 선교 봉사를 선택한 청년이 많았는데 그중에 프랭크가 있었다. 그와 친구 헨리 딕슨은 거주 선교사로 페르시아에 발을 디딘 첫 번째 재림교인이다. 그들은 미국 출신의 선교사들처럼 자신들의 헌신이 오래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평생을 보내리라 예상했다.
선교사 가족으로 산다는 것
프랭크가 떠난 뒤 플로렌스와의 관계는 우체국 덕분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은 함께 선교 봉사에 연합해야 할 인연이라고 느꼈다. 둘은 플로렌스의 부모가 살고 있던 런던에서 결혼했고 신혼을 보내기 위해 페르시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때가 1913년이었다.
오스터의 이란 선교를 전기적으로 기술한 책 <페르시아로 사랑과 함께(To Persia, With Love)>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따금 나타나는 열정과 충성이 이슬람 신자들에게…시작할 때부터 보인다. 이곳의 선교 사업은 전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고 입증됐다. 페르시아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활동한 첫 50년 동안(1911년에 시작) 선교사는 총 29명이었다. 거기서 프랭크와 플로렌스 오스터는 11년 동안(1914~1925) 단 둘이 일했다.”1
결국 프랭크는 중동에서 35년간 일했는데 그중 27년을 페르시아에서 보냈다.
오스터 부부는 페르시아에서 자신들에게 꼭 맞는 역할을 찾았다. 프랭크는 안식일학교 교재를 사용해서 가정 집회와 성경 연구 모임을 이끌었다.2 플로렌스는 지역 공용어인 터키어를 배우는 일에 분주했는데 교재로 성경을 사용했다. 그녀는 곧 이웃 여자아이들을 모아 영어를 가르쳤다. 여자아이들이 영어를 배울 때, 그녀는 자신이 읽고 있는 성경 구절을 설명하면서 터키어를 연습했다. 영어를 배운 몇몇 여자아이가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했고 그녀는 이웃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오스터 가족의 삶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심각한 질병을 앓았고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쿠르드족의 공격으로부터 피신해야 했다. 병으로 두 아이를 잃었고 제한적인 자금으로 살아남아야 했고 매일 외로움과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의무에 충실했다. 대총회로부터 휴가를 권고받았을 때, 그들은 선교지에 머물기로 선택했다. 갖은 수고 끝에 교회가 막 활발해지려는 참이었다.3 플로렌스는 이렇게 말했다. “안 돼요. 프랭크, 우리가 떠나면 하나님의 사업은 힘들어질 거예요. 우리는 떠날 수 없어요.”4
오스터 가족은 학교들을 세우고 고아들을 먹이고 입혔고 난민들을 도왔다. 교회는 중동에서 조금씩 한 번에 한 사람씩 성장했다. 그들이 터키 이스탄불로 이주했을 당시 “선교 사업을 살펴보면 개척 당시의 제로 상태에서부터 미국과 유럽의 유능한 일꾼들이 활약하는 안정되고 굳건한 선교지로 변모했다.”5
그들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주민 대피령 내렸을 때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을 개척하는 데 자신들의 생애 중 35년을 바쳤다. 좋았던 때와 안 좋았던 때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아주 작은 결과들을 위해서 숱한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야 했다. 단순히 수치로만 보자면.”6
계속되는 유산
오스터 가족은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었다는 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 스토리의 마지막 쪽을 보면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 플로렌스는 한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부담이 너무 크지 않았나요? 그 모든 대가가 너무 비싸지 않았나요? 더 나은 사업에 생애와 재능을 바칠 수 있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수천 번을 생각해도 아닙니다.’”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이 모든 세월 동안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삶을 살면서,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손길은 너무나 많았다. …마음을 달래 주시는 성령의 위로를 그들은 다른 어떤 것도 바라고 싶지 않을 만큼 무척 자주 느꼈다.”7
오스터 가족이 밝힌 깜박이는 영적 불꽃은 1970년대의 이란 혁명으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 고대 땅에서의 사업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도전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거세다. 하나님의 사업은 어떻게 마쳐질까? …하나님의 섭리라는 은혜 안에서 일하고 있는 새로운 개척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8
그 깃발을 받아 들고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하나님을 위해 힘든 일을 감당할 자 누구인가?
1 Kenneth Oster and Dorothy Minchin-Comm,
2
3 Kenneth Oster and Dorothy Minchin-Comm,
4 앞의 책
5 앞의 책, 160
6 앞의 책, 188
7 앞의 책, 190
8 앞의 책, 4
베스 토머스 프리랜서 작가이자 편집자이다. 가족과 함께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발문
오스터 내외는 의무에 충실했다.
캡션
프랭크 오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