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는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연합
분쟁하는 나라
연합이라는 기적에 관하여
예수께서 악마와 함께 일한다는 고소를 당하고 있다.
침례를 받은 후에 사막에서 유혹자를 물리치며 단호하게 “사탄아, 물러가라”(마 4:10)라고 쫓아내셨던 분, “마귀의 일을 멸하려”(요일 3:8) 오셨던 분이 “귀신의 왕”과 협력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더러운 영들에게 “잠잠하고…나오라”(막 1:25)라고 엄히 명하셨던 그분이 무리에게 “귀신 들렸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요 7:10; 10:20 참조).
그분이 감추고 있는 사실?
예수가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후 이 모든 것을 보았던 무리는 상이한 결론을 내린다(마 12:22~30 참조). 한 무리는 그를 약속된 메시아라고 불렀고 다른 무리는 강신술사로 여겼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24절).
예수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이런 시도는 그분의 진실성을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그대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로 그 사람이 맞는가? 숨겨진 의도가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더 나아가 감추어진 추한 비밀이 있지는 않은가? 사탄을 위해 은연히 일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와 바알세불을 한데 묶는 것은 심각한 모욕이었다. 바알세불(히브리어 ‘바알제붑’에서 옴)은 ‘파리 대왕’ 혹은 ‘쓰레기 대마왕’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파리 같은 추종자들을 모으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순간을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중요한 영적 진리를 나눌 기회라고 여기셨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5~28).
예수는 놀라운 주장을 한다. 하나님의 성령과 사탄 및 그의 추종자들은 서로에게 정면으로 반대할지라도 자신들의 사명 안에서는 연합한다. 사탄은 분열시키고 정복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해방시키고 연합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은 어떤 편과 함께할지 택할 수 있다.
어떤 정신으로
성경은 사람들을 선과 악, 바름과 그름으로 나누려는 사고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둘 중 하나는 ‘옳은’ 편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런 게임을 좋아한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 능숙하다. 떳떳하다고 여기는 문제들조차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게 마련인데 이런 태도는 바뀔 줄을 모른다. 독일에서는 그런 사람을 ‘레흐트하버(Rechthaber)’라고 부른다. 자신이 늘 옳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이다. 바리새인들은 이 정신을 영적인 차원으로 확장했다. ‘우리는 선하고 너희는 악하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므로 너희는 하나님과 반대편이며 악마와 마귀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막 8:15)고 경고하셨다. 이처럼 정신적으로 유독한 ‘발효제’는 결국 위선으로 치닫는다. 이유는? 그런 사고방식에서는 자신이 비난하는 바로 그것을 행하면서도 동시에 그렇지 않은 척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히브리어로 ‘페루심’인데 ‘자신을 구별한다’는 뜻인 ‘포레시’에서 왔다. 바리새인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다른 이들과 멀리 떼어 놓는 사람이다.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을 아무리 잘 분석한들 가장 중요한 영적 사실은 ‘그냥 놔두면 활개치고 다닐 바리새인이 우리 각자의 내면에도 있다’는 것이다.
모으는 왕국
‘페루심’의 사고방식은 배타적이다. 예수는 포용적이다. 페루심 사고방식은 종교의 이름으로 분리를 자행하고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은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선한 목자는 처음에 함께 속했던 곳으로 함께 돌아가려는 한 목표를 마음에 두고 각처에서 자기 양들을 모은다. “내가 비옵는 것은…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믿는 자들]도 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요 17:20~24). 반대로 예수와 더불어 모이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흩어진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마 12:30).
하나 되는 기적
분명히 말하자면 예수께서 기도로 구하신 ‘완전한 연합’은 영적인 기적이며 인간의 어떤 ‘지름길’도 통하지 않는다. 이것은 훨씬 기나긴 관계의 과정에서 비롯한 결실이다. 그 과정을 성경에서는 “온전하게 매는”(골 3:14) 사랑의 길이라고 묘사한다. 연합이란 변화 과정의 정신과 그 결과 모두를 의미한다. 그것은 결속과 이해를 추구하는 태도이다.
하나 됨(ONE)의 정신은 다음 요소를 포함한다.
·우리 자신(Ourselves, 몸·마음·영혼의 내적 치유와 회복)
·이웃(Neighbor, 관계의 치유)
·대적(Enemy, 참된 연합을 위협하는 요소를 마침내 이겨 내는 것)
이 모든 것은 용서의 정신이 이끄는 기적에 근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을 상기시킨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용서는 천지 창조, 한 사람의 변화, 죽은 자 중에서의 부활만큼이나 위대한 기적이다.
이상 속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흩어진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를 보았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고 하나님이 물으셨을 때, 그는 답을 알지도 못했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감히 믿지도 않았다(겔 37:3). 우리는? 아마도 같을 것이다. 교회의 교리와 규정이라는 “마른 뼈”가 살아날 수 있을까? 교회 규정과 교리들도 적절한 자기 자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저 뼈들을 ‘근육과 살’ 그리고 ‘피부’로 덮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이 생기를 몸에 불어넣을 수는 없다(8절 참조).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5절).
여전히 연합이 다시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가? 평강의 왕을 위한 중재인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내적 바리새인’으로 이 세상을 더욱 분열시킬 수도 있는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 37:11, 9).
다니엘 빌데만 독일 재림교회 출판사(Advent-Verlag Lüneburg) 단행본 편집장이다. 파올라 오르수치아와 결혼해 독일 북부 뤼네부르크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시내에서 딸 기울리아와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