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발자취
그리스도를 위한 떠돌이
변화를 일으킨 한 사람의 사역
2018년 10월, 남편과 나는 미국 미시간주 배틀크리크에서 열린 대총회 연례 행정위원회에 참석 중이었다. 식당에 들어가 제프 조던과 그의 아내 멀리사와 합석했는데 재미있고 생기발랄한 시간이었다. 대화가 흥미롭고 활기가 넘쳐 멀리사는 청각장애인 남편 제프에게 통역해 주느라 식사를 못할 정도였다.
제프 목사는 테네시 칼리지데일 근처에 있는 서던 데프 펠로우십 교회(청각장애인교회, Southern Deaf Fellowship)를 섬기고 있다. 제프가 미국 수화를 구사하며 손을 움직이면 멀리사가 통역한다. 2016년에 제프는 대총회 특수사역사무소 청각장애인 담당 부코디네이터(명예직)로 임명됐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제프 목사 내외는 배틀크리크 오크힐 공동묘지에서 자신들이 발견한 내용을 신나게 이야기했다.1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재림교회 최초의 ‘선교사’로 여겨지는 엘리팰릿 M. 킴벌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강한 호기심이 생겨 조사에 착수했고 재림교회 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남자의 놀라운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엘리팰릿 모렐 킴벌은 1816년 3월 13일 뉴햄프셔 라임에서 태어났다. 그는 엘리팰릿과 베시 킴벌 사이에서 태어난 열두 자녀 중 한 명이다. 네 살 때 홍반열을 앓고 나서 청력을 잃었다.
엘리팰릿이 태어날 당시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는 청각장애인 자녀를 둔 몇몇 부모가 자녀를 교육할 방도를 찾고 있었다. 1817년 그들은 농아(聾啞)를 위한 교육과 지도를 위해 코네티컷에 시설을 세웠다.2 엘리팰릿의 인생 여정에 끼친 영향을 감안한다면 이 기관이 그를 위해 예비된 것이 분명하다.
엘리팰릿이 15세 때 부모는 그를 이 학교에 보냈다. 학교는 읽기, 쓰기, 수학뿐 아니라 종교적인 훈련도 강조했다. 그곳에서 엘리팰릿은 수화로 대화하는 법을 배웠고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메리 웹스터를 만났다. 그녀 역시 청각·언어장애자였다.3 두 사람은 1839년에 결혼해 뉴햄프셔에 정착했으며 비장애인 두 자녀를 두었다.
1852년, 내외는 서부로 가기로 결정했고 중간에 멈춰 인디애나에 있는 ‘농아인’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기간 엘리팰릿은 인간이 불멸의 영혼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는 글이 담긴 소책자를 받았다. 평생 침례교인이자 열렬한 성경 연구가였던 엘리팰릿은 책자와 비교하며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형과 함께 살기 위해 위스콘신으로 이사해서도 계속 성경을 연구했다. 1860년, 메릿 E. 코넬이 전도회를 시작했을 때 엘리팰릿 가족은 아이오와 애나모사에 살고 있었다. 법원 청사에서 열렸던 집회에 많은 사람이 열심히 참석하고 관심을 보였지만 청각장애로 인해 킴벌 가족은 그 모임에 대해 알지도 참석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자녀들이 집회 이야기를 듣고 부모에게 전해 주었다. 엘리팰릿은 코넬에게서 안식일에 관한 인쇄물을 얻을 수 있었고 다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안식일에 대한 확신이 들자 그와 아내는 자신들끼리지만 안식일을 신실하게 지켰다.
킴벌의 딸이 결혼하여 미주리로 이사를 했고 아들은 캔자스로 이사를 갔다. 1867년 킴벌 부부는 6개월 동안 딸과 지내며 안식일을 함께 지켰고(딸의 믿지 않는 남편은 빼고), 아들과 지내는 6개월은 부부만 안식일을 지켰다. 2년 뒤 엘리팰릿의 아내 메리가 죽어 캔자스 레번워스에 묻혔다.
아내가 죽고 6개월 뒤 자신과 같은 장애를 지닌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강렬한 소망으로 엘리팰릿은 ‘떠돌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농아인’들이 들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께서 가르치고 전하라고 이끄시는 대로 가고자 했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자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녔고 자신을 받아 주는 사람은 누구와도 함께 지내며 사역했다. 캔자스, 아이오와, 일리노이,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버몬트, 코네티컷 그리고 메인주에서도 살았다.
자신의 손을 사용하여 가르치고 소책자를 전하자 킴벌이 가는 곳마다 회심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875년 6월 호 <애드벤티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는 킴벌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인트 조지프에 있을 때 그를 찾아온 사람이 안식일을 받아들였고, 남부 네브래스카에서도 그가 진리를 전한 두 사람이 안식일을 받아들였다. 그 이후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뉴저지, 로드아일랜드 그리고 뉴욕과 브루클린의 도시들을 방문했고, 킴벌은 이제 메인주에서 사역하고 있다. 코네티컷에서 언어장애인 3명이 안식일을 지키고 있고 두 명이 더 안식일을 지키고 싶어 한다. 매사추세츠주에서 3명이 안식일을 지키고 있고, 엘리팰릿이 말한 진리들을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뉴햄프셔에서는 이제 5명이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4
엘리팰릿은 힐 박사 집에서 6개월간 머물면서 그들의 ‘농아인’ 딸을 가르쳤다. 그때 그는 박사 부부의 딸에게 성경의 진리들을 소개했다. 1877년 인디애나 장막부흥회에서 설교한 엘렌 화잇이 힐 박사 부부를 만났다. “이 모임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힐 내외의 16세 딸이다. 언어장애인인 그녀는 기도 팀에 합류하여 수화로 기도했다. 정말 가장 엄숙하고도 인상적인 모습이었다.”5 화잇은 계속하여 힐 부부와 딸이 침례를 받았다는 말도 전한다. 열흘 뒤 매사추세츠 그로브랜드에서 개최된 장막집회에서 농아인 3명이 더 침례를 받았고 그중에는 벤저민 브라운 내외가 있었다. 엘리팰릿의 전도로 얻은 결실이다.
1년 뒤 엘렌 화잇은 그를 만난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언어장애가 있지만 장애인들 사이에서 선교사로 봉사해 온 킴벌 형제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끈기 있는 노력으로 숱한 이가 진리를 받아들였다. 자신이 인도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이 신실한 형제를 연례 장막집회에서 여러 차례 만났다. 그는 언어장애 친구들에 둘러싸여 앉아서 손으로 활발히 말씀을 전하고 있었는데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 진실로 들을 귀가 있는 어떤 이들은 대화의 내용을 받아 적고 있었다. 그는 선교 사역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자신이 지닌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 머지않아 신실한 그는 귀중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6
엘리팰릿은 그의 선교적 노력을 계속하다가 지병을 치료하고자 배틀크리크 병원으로 옮겼고 71세로 눈을 감았다. 생명의 시여자께서 부르실 때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무덤에 묘비가 세워져 있다. 그날이 오면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진리를 듣고 말하고 노래할 것이다.
엘리팰릿이 오래전에 시작한 그 일은 계속되고 있다. 그가 문서와 통역을 통해 청각장애인들이 말씀을 ‘듣도록’ 한 것처럼 전 세계적으로 12개 국가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해 설립된 재림교회 사역이 진행 중이다(www.adventistdeaf.org).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사 35:5~6)하게 될 그날은 얼마나 시끌벅적한 축하의 날이 될 것인가!
1 조던 내외는 재림교회 선구자들을 광범위하게 연구한 앙드레 바르보사 데 올리베이라와 더글러스 실바의 강연에 참석하여 엘리팰릿 킴벌에 대해 알게 됐다.
2 오늘날의 미국 청각장애인 학교다. 이곳은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최초의 미국 학교다.
3 농아(聾啞)에 해당하는 영어 deaf and dumb, deaf and mute, deaf-mute은 19세기에 사용하던 말이고 현재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deaf(청각장애인)가 적절한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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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 포이리어 <애드벤티스트 월드> 운영 담당자이다.
발문
그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자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녔고 자신을 받아 주는 사람은 누구와도 함께 지내며 사역했다.
캡션
미시간 배틀크리크 오크힐 공동묘지에서 엘리팰릿 킴벌의 묘비를 찾은 제프 조던(왼쪽)과 아내 멀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