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사역
새벽 2시, 병원의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대화가 잦아든다. 이야기의 밑천이 다 떨어졌다.
용기를 주는 성경 말씀도 읽었고 자녀·손주 이야기도 할 만큼 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의료진이 보여 준 희망적인 지표들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가끔 형광등이 깜박인다.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희망도 그와 같다.
반짝이는 철제 문안에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고 소중한 누군가가 있다. 복도에 발소리가 나거나 바퀴 달린 침대가 지나갈 때마다 정상적인 소리조차 불길한 소리로 만들어 버리는 공포감에 호흡이 빨라진다.
목회 초년에는 희망이 있는 한 진심을 다해 천천히 지혜로운 말을 전하고 믿음을 북돋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극심한 슬픔으로 마음이 뒤틀려 있을 때, 눈물이 아무런 안도감을 주지 않을 때, 좀처럼 걱정이 떠나지 않을 때 언어로는 빈곤하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말이 그 역할을 다했을 때는 결국 한 가지 사실만 남는다. 걱정과 상처와 슬픔 속에 있는 이들 곁에서 함께 기다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이 있을게’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긴 다정한 손길, 손을 붙잡고 어깨를 감싸 주는 그 행동이야말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때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몸이 아프고 마음에 치유가 필요할 때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손을 붙잡고 있는 또 다른 신자의 존재는 곧 예수님의 존재인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자정을 넘긴 시각에 우리와 함께 기다려 주는 그 ‘예수님의 제자’를 보면서 세상 끝까지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마음에 떠오른다.
그 자신이 끔찍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친구들의 안위를 간구하셨던 주님께서는 ‘서로 짐을 지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한다’는 계획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다(갈 6:2). 매일 그리고 매주, 우리 둘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격려하고 지키기 위해 선물로 보내 주신 사람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우리를 그들에게로 보내신다. 그들과 함께 기다리고 시간을 보내면서 ‘있어 줌’ 그 자체가 어떤 말보다도 힘이 되는 순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도록 말이다.
이번 달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놀라운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통의 순간에 ‘존재’라는 그리스도의 선물을 선사하는 경건한 남녀의 등장으로 얼마나 자주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를 눈여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