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오솔길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
2001년 12월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12월 1일, 아르헨티나의 경제부장관은 모든 은행의 예금 인출을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누구도 자기 계좌에서 돈을 인출할 수 없었고 신용카드와 직불카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현금이 최고였다. 집에 현금이 없으면 곧 모든 것이 꼬였다. 예금 인출 동결은 2~3일 정도만 실시될 예정이었다. 초기에 이루어진 아르헨티나의 통화인 페소의 평가절하는 구매력을 절반으로 떨어뜨렸다. 사회적 동요는 급속히 커졌다. 식량을 살 수 없는 사람도 먹어야 했고 이는 상점 약탈로 이어졌다.
2001년 12월에 우리는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작은 대학 마을의 자동입출금기에도 현금이 바닥났다. 집에도 돈이 거의 없었고 은행이 언제 다시 업무를 시작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고요한 밤’을 부르며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받는 동안 아르헨티나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4살, 2살인 두 딸은 그 모든 것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날씨는 쾌청했다. 학교(또는 대학교) 수업은 없었고 크리스마스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내와 나는 우리 아이들만큼 침착하지는 못했다. 동네의 작은 지역 슈퍼마켓과 쌓은 대학의 신용 덕분에 우리는 굶지는 않았다. 우리는 약간의 현금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큰 마을로 운전해 가서 딸들을 위한 다양한 색깔의 작은 선물을 사기로 했다. 물건이 거의 없었다. 현금이 있다 해도 진열대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우리는 딸들에게 줄 플라스틱 컵 두 개, 플라스틱 쟁반 두 개 그리고 시리얼 그릇 두 개를 샀다. 우리가 원하던 것들과 정확히 같진 않지만 말이다.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선물을 열어 볼 시간이 되었다. 노란색과 초록색 플라스틱 접시와 더불어 아내 샌탈은 딸들을 위해 귀여운 앞치마를 만들었다. 포장지를 뜯고 각자의 플라스틱 접시를 보면서 기뻐하는 딸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상기된 얼굴로 다음 식사 때 그 접시들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1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접시들은 우리 찬장의 한곳에 자리 잡고 있다. 흠집이 약간 있지만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감사와 기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물건이기에 감히 버릴 수가 없다.
기쁘지 않을 때
포로기 이후의 예루살렘에 살았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힘든 시절을 겪었다. 수십 년 전 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였던 자기 백성(적어도 그러기를 희망한 자들)을 데리고 나오셨다(스 1~2장). 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절망이었다. 도시와 성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성벽도 보호 장치도 없었다. 주변에는 다시 돌아온 자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출하는 이가 많았다.
첫 번째 무리가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지 80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나아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힘든 경우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하나님이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듯 느껴질 때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또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듯 보일 때 어떻게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문제는 단순히 물질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지켜 줄 새로운 성벽이 필요했고 하나님은 그 필요에 응답하셨다. 하지만 부서진 벽들을 넘어 그들은 자신의 망가진 삶을 바로잡아 줄 하나님이 필요했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할 때 우리는 부서진다.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필요에만 몰두할 때 우리는 부서진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삶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다. 이스라엘은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았다. 이기심과 탐욕은 기쁨과 희망을 죽인다.
치료제
그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는 총독 느헤미야와 함께 회의를 소집했다(느 8장). 그들은 수문 앞 광장에 초막을 지었다. 초점을 되찾고 부흥이 일어나게 하는 한 가지, 즉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사람들이 초대됐다. 그것은 일상적인 오전 11시 예배가 아니었다. 아침부터 낮까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인 토라의 내용을 읽었다. 히브리어를 잊어버린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의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동시 통역을 좋아했다(느 8:7~8).
이기적인 현실에 사로잡혀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대다수는 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볼 때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말씀에 귀 기울인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청중도 울었다(9절). 그때 에스라는 놀라운 말을 한다.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10절).
이것은 건강 개혁과 건강한 삶에 대한 구절이 아니다. 정제되지 않은 식품과 종종 매우 제한적인 식량이 공급되는 곳에서 살진 것을 먹과 단것을 마시는 것은 일종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풍성하게 주시고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자. 그리고 이 축복을 다른 이들과 나누자.”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이다. 느헤미야는 말한다. 이 모든 것을 하자.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
구약 전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 의아해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란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더 놀랍고 흥미로운 것을 가리키는 것인가?
자신의 백성이 예배로 연합하여 마침내 큰 그림을 이해하는 것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기뻐하셨다는 의미도 될 수 있을까? 언어학적으로 두 가지 모두 가능한 해석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나는 두 번째 해석에 더 공감한다. 복잡한 신학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힘은 스스로 만들어낸 기쁨에서 생기는 게 아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구원과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기쁨 속에서 만들어진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해 하늘에 기쁨이 있다고 귀띔해 주신다(눅 15:7). 탕자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아들에게 달려와 그를 끌어안고 연회를 열라고 명하는 아버지에게서 우리는 그 같은 기쁨을 볼 수 있다(20~24절).
나의 두 딸은 2001년 아르헨티나 페소 폭락 사건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플라스틱 접시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그들의 기쁨이 그날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힘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 안에서 만들어졌다. 감사할 줄 모르고 쉼이 없는 자들에게 은혜를 즐겨 베푸시는 놀라운 우리 하나님!
*G. C. I. Wong, “Notes on ‘Joy’ in Nehemiah viii 10,”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지의 부편집인이다. 하나님의 기쁨을 깊이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열망한다.
발문
이기적인 현실에 사로잡혀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