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고 싶은
용감한 교회
제럴드 A. 클링바일
용기의 DNA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우뚝 서다
시간이 멈춘 듯하고 곧 운명이 결정되려는 중요한 순간을 느껴 본 적이 모두들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기 위해 택하신 그 사람 역시 가슴이 쿵쾅거렸고 두려움 섞인 긴장을 느꼈다. 여호수아는 초조했다. 이스라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진입한 뒤 여리고에서 북동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길갈에 진을 쳤다. 광야 세대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했고 땅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가 거의 끝나 갔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확신이 덜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여리고 영토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하나님으로부터 진격 명령을 받지 못했고(수 6:1~5), 그래서 여리고 방어선의 허점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런데 허점이 없었다!
최악의 악몽은 별안간 현실이 되었다.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그와 마주 섰다(수 5:13). 여호수아는 칼을 뺄 새도 없이 그와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한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13절).
참 좋은 질문이다.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면 나를 위하는 자와 나를 대적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신중하게 지켜보고, 주의 깊게 듣고, 조심스럽게 예측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14절). 여호수아에게 무슨 대답이 더 필요했을까? 그는 땅에 엎드려 절한다. 하나님을 알아본 것이다.
아군인가 적군인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쉽게 구별되는 때가 있는 반면, 시간이 갈수록 더 혼란해질 때도 있다. 첨예한 문제들이 생기고 상황은 더 복잡해지고 어느새 나 자신은 인생의 회색 지대에서 옳고 그름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으려고 발버둥친다.
그때가 바로 최고의 사령관을 만나 그분의 진격 명령에 귀 기울여야 할 순간이다. 그 운명적인 날에 여호수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신발을 벗는 것이었다. 군사 전략에 대한 복잡한 논의는 없었다. 다가올 전투의 구체적인 내용도 없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15절).
여기에 배울 점이 있다.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최고 사령관을 영접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멈추고 그분께 경배해야 한다. 다음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궁금해하며 쉴 새 없이 서성거리지 않고 그분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다. (성경에 계시된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전달된)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면 그제야 하나님의 참뜻을 깨닫고 용감히 나서야 할 순간을 분별하게 된다.
왜 우리인가?
“하필이면 왜 우리이고 왜 지금이지?” 이것은 기원전 6세기의 예루살렘에 들어맞는 질문이다. 세상은 완전히 변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마치 재난의 정중앙에 위치한 듯했다. 십 대였던 다니엘과 세 친구는 가족, 집, 나라를 등지고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재교육과 훈련을 위해 선택되었다. 바벨론의 새 왕인 느부갓네살 2세는 엘리트 관료들을 양성하고 싶었다. 바벨론의 기념비적인 이슈타르 문을 통과하며 그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모든 것이 더 크고 강하고 좋았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궁정과 학술원에서는 그들을 환대했다. 훌륭한 대우를 받았고 왕의 식탁에서 식사했다.
그 순간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부유하고 풍요로운 왕의 식탁에서 느부갓네살의 신들에게 바친 음식을 먹으며 더럽혀지기를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튀는 행동으로 왕의 눈 밖에 나서 목이 날아갈 각오를 할 것인가?(단 1:3~10)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에 직면할 때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까?
히브리 청년 네 사람은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뒤 감독자를 찾아가 특이한 요청을 했다. “소생들에게 열흘 동안만 시험 삼아 야채와 물만 먹게 해 주십시오”(단 1:12, 공동번역).
타당성을 입증할 열흘이었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을 일을 하나님이 행하시도록 기다리는 열흘이었다. 열흘 동안 다르게 먹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들은 그렇게 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태도를 존중해 주셨다. 그들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들은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다른 순간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다음에는 훨씬 어려운 일이 닥칠 것이기에.
해피 엔딩
다니엘 3장은 이러한 순간들 중 하나를 묘사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왕은 예언적 꿈에서 보았던 이미지에 영감을 받아 거대한 상을 만들었다(단 2장). 꿈과 다른 것은 이 상을 완전히 금으로 덮었다는 것뿐이다. 바벨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느부갓네살이 세상을 향해 보내는 메시지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미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자 지방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도록 임명된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에 대한 도전이었다. 로마 제국의 다른 지도자들과 더불어 그들은 웅장한 음악이 울리면 금 신상에 엎드려 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신상의 높이는 28미터, 폭은 2.8미터. 하나님께 대한 도전은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음악이 울리고 군중이 절했지만 세 청년은 엎드려 절하지 않았다.
느부갓네살은 분노했다(단 3:13). 어떻게 히브리 청년 셋이 감히 세상의 절대 권력자에게 도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경배받을 분은 하나님뿐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겠다고 위협하는 느부갓네살왕의 분노에 직면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영원히 기록될 말을 남긴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6~18절).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이 말을 듣는다. 그래서 맹렬히 타는 풀무불이 이 히브리 청년들을 해하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우리의 문화에는 어찌되었든 해피 엔딩이 녹아 있다. 그런데 해피 엔딩은 불타는 풀무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용기를 발휘해야 할 상황에서 해피 엔딩은 죽느냐 사느냐로 판가름 날 뿐 아니라 충성, 진정성, 진실함, 흔들림 없는 헌신 등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포로수용소와 무의미한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고취된 용기는 당당하게 빛난다. 심지어 고통과 상실이 따르더라도 말이다. 그런가 하면 어리석음을 용기로 위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다.
예수님의 방법
충성과 진실성, 능력, 은혜가 예수님의 사역에서 나타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용기도 보여 주셨을까?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이 중요한 질문에 답을 제공한다.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고통과 이별이 임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기 뜻을 아버지의 뜻 앞에 기꺼이 내려놓으셨다. 이를 위해서는 용기 그리고 신뢰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용기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분의 왕국에서 핵심적 가치관은 용서, 오래 참음, 인내를 포함하며 이 모든 요소는 진정한 용기를 나타낸다. 그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가르치셨다(마 5:41). 그분은 용서라는 문화 저항적인 힘에 대해 수없이 말씀하셨다(마 18:21~22). 원수를 사랑하라고 격려하셨고 몸소 그렇게 사셨다(마 5:43~47).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 23:13~39)는 눈물을 글썽이셨다(소망, 620). 그들의 가차 없는 비판에도 아랑곳 않고 그들이 변화하기를 갈망하셨다. 하나님의 용기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 예수께서는 주변인이나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 용기를 보여 주셨다. 여자나 어린아이들은 그분의 임재 가운데 평안함을 느꼈다. 그분께서는 나환자들을 고쳐 주셨고(마 8:1~4) 미움 받던 세리의 집을 방문하셨다(눅 19:1~10). 그분께서는 가난한 자, 과부, 고아,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실 때도, 왕국의 가치를 구현한 인물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고 미움 받던 사마리아인이었다(눅 10:30~37). 예수께서는 갈등을 부추기거나 논쟁을 즐기지 않으셨고 환부에 손가락을 대는 것도 피하지 않으셨다.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실 때에도 친절과 동정심으로 대하셨다. 부자 청년과 나눈 예수님의 대화를 묘사하는 구절도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로 시작된다(막 10:21). 결국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돌아갔다. 그 순간, 그의 선택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 마음이 아프지 않은가? 용기는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이 궁금하다. 이 청년은 부활의 아침과 오순절 이후 어떤 결심을 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
정치적 공정성과 편파적 발언의 시대에, 하나님은 박해와 무관심의 한가운데서 용기를 따르는 사람을 찾으신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우리는 언제 문화 저항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늘의 최고 사령관과 만난 여호수아처럼 이러한 용기는 우리를 순종과 예배로 이끌 것이다. 심지어 문제의 앞뒤가 맞지 않을 때에도 말이다.
여리고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 여호수아의 용기는 하나님을 경험한 만큼 자랐다. 시련과 도전 앞에서 그의 용기가 기만적인 기드온 사람들의 낡은 옷만큼이나 너덜너덜한 적도 있었다(수 9:4). 그러나 여호수아는 뒤돌아서지 않았다. 하나님 군대의 사령관을 따르면서 그는 태양과 달에게 멈추라고 명령할 수 있었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했다(수 10:12~14). 문화 저항적인 왕국의 가치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경건한 용기를 실천하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언제나 인정받고 존중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용감한 지도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 한가운데서 자신을 발견하는 달콤함이 있다.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를 바라보며 용기를 얻는다.
내가 다니고 싶은
용감한 교회
윌로나 카리마바디
희생이 가치 있을 때
결과에 상관없이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여기서 소개할 이야기에는 두 부분이 존재한다. 하나는 해피 엔딩이고 다른 하나는 해피 엔딩이 아니다. 하지만 두 부분에 공통분모가 있다. 죽음까지 포함하는 끔찍한 결과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른 사람을 어떤 상황에서도 홀로 두지 않으신다.
요주의 인물
존 헨리 바이드너는 1912년 벨기에의 네덜란드인 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바이드너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제네바의 스위스 국경 건너편 프랑스 콜랑주에 있는 살레브 재림교회 대학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바이드너는 어렸을 때 그림 같은 캠퍼스 주변에 있는 산들을 오르며 스위스 국경과 지역 안팎을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는 몇 년 뒤 실행할 일을 위해 중요한 기술들을 익히고 있었다. 콜랑주에서 일부 학업을 마치고 나서 그는 제네바와 파리에서 경영과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섬유 산업을 시작하여 성공을 거둬 처음에는 파리에서 시작한 사업을 프랑스 여러 지역으로 넓혀 나갔다.
1940년 6월, 파리 시민들은 점점 접근해 오는 독일 군대를 피해 도시를 떠나고 있었다. 프랑스-벨기에연합회 사무실은 프랑스 수도에 위치해 있었고 바이드너의 여동생 가브리엘이 연합회장 비서로 근무하고 있었다. 연합회 사무실을 프랑스 남부 지역으로 옮겨야 했고 바이드너가 사무실 이전에 도움을 주었다. 당시 그는 리옹에서 일하고 있었고, 바로 이곳에서 ‘네덜란드-파리’라는 지하 레지스탕스 조직에 몸담았다. 이 조직은 300여 명의 ‘첩보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네덜란드에서 벨기에와 프랑스를 거쳐 중립국인 스위스로 가는 길 그리고 보다 위험한 경로인 피레네산맥을 경유하여 안도라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는 탈출로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유대인 800여 명, 추락한 연합군 비행사 100여 명 등 수많은 사람이 나치 정권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전쟁이 시작되자 한 인간으로서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들을 도울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유대인은 스위스나 스페인에서는 안전했어요. 이런 나라들은 중립국이기 때문이죠. 문제는 네덜란드에서 스위스까지 가는 방법입니다. 곳곳에 게슈타포, 나치의 친위대원, 군사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국경은 봉쇄됐고, 유대인들이 스위스로 가려는 것을 나치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와 스위스 사이의 국경은 경비가 삼엄했어요. 하지만 저는 대학 재학 시절 콜랑주, 프랑스, 스위스 사이의 국경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바이드너는 말했다.1
이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나치의 눈에 띄게 되었고 게슈타포의 지명 수배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 얼마 후에는 체포되어 3번에 걸쳐 고문을 당했고 ‘리옹의 도살자’로 악명 높은 클라우스 바르비에게 심문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는 때때로 알 수 없는 도움을 받았고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용케 죽음을 모면했다.
그러다 네덜란드-파리 조직원 한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결국 조직원 150여 명의 이름을 발설하고 말았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강제 수용소로 이송됐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놀랍게도 바이드너는 무사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임시로 네덜란드 정부를 위해 나치 협력자 색출을 도왔다. 이후 1950년대 바이드너는 훌륭한 재림교인 파트너이자 아내인 나오미를 만나며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바이드너 자연식품으로 알려진 건강 식품점을 열면서 두 번째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지역 사회 및 지역 교회에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바이드너는 유럽에서 보낸 삶에 대해 함구하고 싶었지만 전쟁 당시 그의 노력이 곧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미국 자유 훈장, 영국 기사 작위,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훈장, 네덜란드 저항 훈장을 받았다. 프랑스는 그에게 무공 십자 훈장, 레지스탕스 훈장 그리고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을 수여했다. 벨기에는 그를 레오폴드 국왕의 장교로 임명했고 이스라엘은 그를 열방의 의인으로 선정하여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 바셈에서 그를 기념했다. 1993년 워싱턴에서 미국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이 문을 열었을 때, 그는 구조자로 인정받아 촛불 점화자 7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선발됐다.
그때 바이드너는 이렇게 말했다. “살다 보면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할 것인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고자 할 것인지 혹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섬길 것인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지요. 두뇌를 계발하고 지식을 쌓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계발하고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여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그저 이웃을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저에 대한 하나님의 목표였음을 확신합니다.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에게 영웅은 제가 임무를 완수하고 제 책임을 다하며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입니다.”2
존 바이드너는 1994년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창조주를 섬기며 용감하게 살았던 삶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끝까지 굳세게
네덜란드-프랑스 지하 조직원 150명의 이름이 발설되었을 당시, 유독 한 이름이 존 바이드너에게 크게 다가왔다. 바로 그의 여동생 가브리엘이었다.
아름다운 눈과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지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브리엘은 자신의 오빠가 사람들을 국경 너머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체포되었다가 투옥을 면하는 등의 일을 겪을 때 파리에서 평범하게 일하면서 살고 있었다. 어렸을 때 오빠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가 어떻게 ‘네덜란드-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오빠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
1944년 2월의 마지막 안식일, 게슈타포는 파리 재림교회에서 오전 예배를 드리던 가브리엘을 체포했다. 그들은 먼저 그녀를 연합회 본부와 같은 건물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로 데려갔다. 그녀는 프랑스 수도 변두리에 있는 프레스네스 교도소로 끌려가기 전 몇 가지 개인 물품을 챙길 수 있었다. 그녀를 석방시키기 위한 갖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44년 8월까지 그곳에 수감되었다. 8월 중순에 연합군은 파리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이 파리에 진입해 해방시키기 전 1944년 8월 21일에 가브리엘은 독일 북부에 있는 악명 높은 라벤스브뤽 강제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연합군은 1944년 8월 25일 파리를 해방시켰다.
라벤스브뤽 수용소에서 정치범으로 지목된 가브리엘은 다른 프랑스인 포로들과 함께 토르가우에 있는 부헨발트 보조 수용소로 이송됐다. 이곳에서 그녀는 강제 노동 곧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다. 토르가우에서 여성들은 폭탄과 수류탄 만드는 일을 했다. 안 그래도 허약했던 가브리엘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됐다. 10월경 라벤스브뤽으로 재이송된 그녀는 보조 수용소인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송되었는데, 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1944년 10월 29일에 그곳에 도착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오로지 몰살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세운 수용소였다. 예상대로 상황은 비참했다. 여자들은 나무 침대 위에 매트리스 대신 종이를 가득 채운 자루를 깔고 잠을 잤다. 너무 아파서 일할 수 없는 사람은 의무실로 보내졌는데, 가브리엘은 대부분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들렌드 비요는 존 바이드너의 친구였다. 그녀 역시 라벤스브뤽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가브리엘을 알게 되었다. 살아남은 비요는 전쟁이 끝난 후 수용소에 있던 존의 여동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가브리엘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대해 놀라운 간증을 했어요. 쾨니히스베르크의 의무실에 있을 때도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죠.”3
1945년 2월, 해방이 임박했다. 움직일 수 있는 여성들은 친위대에 의해 죽음의 행진을 해야 했다. 가브리엘처럼 기력이 없는 사람들은 죽게 내버려 두었다. 마지막 순간에 다른 많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친위대는 수용소 막사와 의무실에 불을 질렀다. 기적적으로 가브리엘은 마지막 순간에 화염에서 구출됐다. 1945년 2월 5일, 수용소는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몇몇 기록에는 그녀가 1945년 2월 15일에 사망했다고 적혀 있지만 라벤스브뤽의 모든 수감자 명단이 들어 있는 문서에는 그녀가 2월 6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 가브리엘의 실제 사망 원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빠 존은 전쟁 후 네덜란드 추적단을 통해 그녀의 무덤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부활을 기다리며 가브리엘 바이드너가 잠들어 있는 곳은 오직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인격화된 용기
바이드너 남매 이야기의 결말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둘 다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도록 양육받았고 그 영향력을 토대로 세상에 그리고 자신들이 겪은 힘들고 끔찍한 상황에 반응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고, 우리 구주와 손을 맞잡고 걸을 수 있고, 우리를 부르신 분이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여전히 확신할 수 있다. 두 남매의 이야기가 바로 그 본보기이다.
1Kristen Renwick Monroe,
2Carol Rittner and Sondra Myers, editors,
3Herbert Ford,
4
윌로나 카리마바디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다.
캡션
13
1946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미국의 황금 종려 자유 훈장을 받는 존 바이드너
14
존 바이드너(가운데)를 기념하여 이스라엘 야드 바솀의 ‘의인의 도로’에 심은 기념식수 앞에서
육군 제복을 입은 헨리 존 바이드너
가브리엘 바이드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