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오솔길
재물인가 생명인가?
하나님이 “선택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우리에게 “살라!”는 의미다. 그분이 제시하신 선택 사항은 영원한 결과를 낳는다. 올바른 선택은 우리의 모든 마음과 의지의 참여를 요구한다.
자동차 제조업의 세기적 전설인 헨리 포드는 ‘모델 T’ 차량의 색상 옵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뻣뻣하게 말했다. “검은색을 선택했다면 모든 색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그 말이 늘 들어맞지는 않았다. 모델 T가 조립라인에서 쉴 새 없이 생산된 총 19년 중 12년 동안은 차량 색상이 모두 검정이었지만 초창기였던 1908~13년 그리고 막바지였던 1926~27년에는 검정색뿐 아니라 초록, 밝은 빨강, 진한 파랑, 갈색, 적갈색, 회색도 있었다. 다양한 색상을 제공한 이유는 늘 그렇듯이 돈을 벌기 위해서다. 검은색은 가장 빨리 건조됐다. 그래서 포드는 검은색을 고집했다. 그러다가 경쟁이 치열해지고 경쟁사가 다양한 색상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시장 점유율을 갉아먹자 그도 색상을 다양화했다.
고대의 현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선택 문제에 있어서 시장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플라톤이 크리톤이라고 칭했던 인물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유배 아니면 독배, 고향에서의 죽음 아니면 유배지에서의 생존을 선택해야 했다.
그대와 나 그리고 선택
우리의 선택은 종종 더 좋아하는 운동, 덜 좋아하는 정치인, 지역 야구 팀, 장거리 휴가지, 영생을 위해 취해야 할 좁은 길 또 심지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에 관한 것들이다.1
사탄은 선택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는 아직도 영원한 빛을 가리는 불행을 선택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랑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생명과 복과 사망과 재앙의 선택 사항을 말한 모세의 고별 호소를 기억한다(신 30:15). 사탄은 여호수아의 고별 때도 있었는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바라는 신을 선택할 수 있지만, 자신과 자신의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하였다(수 24:15).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자기 백성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엘렌이라는 소녀를 부르신 것과 그녀가 “의지란 인간 본성에 내재한 지배력”이라고 말한 사실을 사탄은 알고 있다.2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사탄도 알고 있다.
우리가 선택의 능력을 믿다는 점을 그 역시 알고 있기에 다양하고 화려한, 대단하고 중요해 보이는, 번지르르하고 매력적인 선택 사항들을 퍼붓는다. 그 바람에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사안들을 마구잡이로 다루며 문제들을 빨리 넘겨 버리는게 아닌지 또는 각 문제에 지나칠 정도로 시간을 쏟고 나서 결국은 어설프게도 고질적인 반대나 반대자들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닌지조차 분별하지 못하면서.
선택과 세속적 욕망
우리가 올바르게 선택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루 종일 끝없이 내리는 수백만 가지 결정 중 무엇을 재량껏 선택할 것인가? 다 좋은 것들인데 무엇을 고를까? 어떤 옷을 사고, 입고, 기부할까? 어떤 넥타이를 선물하고 어떤 것을 버릴까? 경건한 사람 중 누구와 데이트를 할까? 우버를 탈까 아니면 리프트를 이용할까? 이 수많은 작은 선택 중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세계나 이웃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무언가를 심사숙고하는 데 우리는 얼마나 분별력 있게 시간과 생각을 쏟아붓는가? 상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가치를 부여한 채 “알지 못하면서 섬기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행 17:23, 한글킹제임스)
적합한 색상, 찬미가, 사람 등 인생에는 선택권을 행사할 것이 가득하다. 분별력이 여기저기로 조각이 나서 늘 모자란 듯하다. 그 희소성은 우리의 숭배 현상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신중함보다는 욕심으로 더 기울어져서 색상, 동물, 정치적 입장, 경제 이론과 같은 단순한 것들을 신격화한다.
우리의 영적 욕심 때문에 율법을 은혜보다 높거나 낮게 여기는 ‘신성한’ 체계, 행위를 믿음보다 더 무겁게 여기는 척도 등이 생겨났다. 위원회 자격 요건은 더 탄탄한 재정, 침례자 숫자로 결정된다. 난센스들의 덩어리를 놓고 벌이는 무모한 싸움에서, 영원한 중요성이 담긴 선택과는 상반된 우리 삶의 가벼움이 폭로되고 있다.
우리 구원의 원수는 시종일관 우리가 부질없고 하찮은 일이나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문제에만 사로잡히도록 또 과대평가된 ‘자기 뜻’을 모든 것의 근간으로 삼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우리가 “끝없는 염려로 생명력을 소모”하는 반면에 “속박의 멍에를 내려놓고” “나의 멍에”3를 메라는 예수님의 자상한 부르심은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데 그는 자주 성공한다. 물론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벼움”인데도 말이다(마 11:30).
선택과 영원
예수님은 의사 결정에 대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제안하신다. 애써 걱정거리를 쟁여 놓지 말고 하나에만 전념하라는 것이다. 그분은 단일화를 거듭거듭 주장하신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구하는 것이다(마 6:33). “필요한 것은 하나뿐”(눅 10:42, 바른성경)이라고 그분은 충고하신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 3:13)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진정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사업과 명예를 으뜸으로 삼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자는 곤란이 사라지고 평탄한 길을 눈앞에서 발견할 것”4이라고 그분은 역설하신다. 우리의 통찰과 해법을 아무리 다 끌어모아도 인생은 그보다 더 복잡하다.
그렇다고 인생이 늘 우리의 생각처럼 복잡한 것만은 아니다. 혹시 아는가? 각 당사자가 하나님을 최고로 삼지 않는 부분들을 기꺼이 전부 내려놓는다면, 밤새 씨름한 문제들이 단 5분 만에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재물인가 생명인가?” 나는 가난과 은혜 덕분에 강도에게 공격받을 일이 없었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감사한다. 이런 선택에는 희생이 따른다고들 한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엄정한 선택 사항을 제시하신다. 재물이냐 생명이냐? 맘몬이냐 영생이냐? 그분만이 모든 것(요 14:6) 되시며 무능력의 대안이시다(요 15:5). 그분께 집중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분을 아는 것이 영생을 아는 것이다(요 17:3). 우리의 선택 사항은 재물이냐 영생이냐이다. 그 선택이 영생에 끼치는 영향력은 얼마나 큰가?
1 www.nytimes.com/1993/05/23/us/town-asks-why-after-a-little-league-killing.html에 게재된 기사 “Town Asks, ‘Why?’ After a Little-League Killing” 참조
2 Ellen G. White,
3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330
4. 앞의 책
레이얼 시저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며 예수님을 선택하고 또 선택하며 기쁨 안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