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들
맹렬한 추적
“의사 선생님, 제발 한 번만 더 해 주세요!”
벨린다1의 끈질긴 애원에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임신부인 벨린다는 나에게 의사로서의 다른 의무는 잊어버리고 점점 극심해지는 산고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자기 아래쪽 등만 문질러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중이었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보기에 출산까지는 10시간 넘게 남았다. 한밤중에 벨린다 곁을 10시간 동안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자기 전에 살펴보아야 할 임신부가 20명도 넘었다. 기나긴 밤이 될 것 같았다.
벨린다가 이렇게 애원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벨린다의 산고가 안타까워 자궁이 수축할 때 오는 고통을 누그러뜨리려 아래쪽 등을 문질러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이러한 내 노력이 얼마나 큰 감사를 받게 될지 알지 못했다. 벨린다의 등을 문지르기 시작하자마자 근처 침대에 있던 환자가 ‘고통을 덜어 주는 등 문지르기 서비스’를 자기에게도 해 달라고 요청했다. 둘 다 내 손길을 원했기 때문에 밤새 이 병실에 갇혀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등을 문질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시간을 쪼개야 한다.’
다른 환자를 살펴보기 위해 옆 병실로 들어가자 복도에서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크타리! 다크타리!2어디 계세요? 내 등 좀 문질러 주세요!” 이런! 벨린다는 올해 가장 끈질긴 환자 상을 받아도 될 것 같았다. 이런 끈질김과 투지도 몇 분만 지나면 사그라들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몇 분이 몇 시간이 되었다.
전체 병동을 다 돌았을 때 벨린다가 병실에서 여전히 나를 큰 소리로 찾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실에 앉아 있다 보니 벨린다가 복도를 다니며 만나는 간호사마다 “눈이 넷 달린(내 안경을 보고 하는 말이다)” 좋은 “의사 선생님”을 보았냐고 묻고 다녔다. 고맙고도 신기하게 내가 고통을 없애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벽 뒤로 몸을 낮추고 벨린다의 눈에 띄지 않게 숨었다. 간호사들이 자지러지게 웃으며 밤새 나를 놀려 댔다.
오늘도 병원 복도로 나를 끈질기게 ‘쫓아온’ 벨린다의 모습이 생각난다. 벨린다는 앞장서서 나를 쫓아왔다. 간절하게 고통에서 벗어나야 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다. 이러한 모습이 끈질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이 이렇게 끈질길 수 있는데, 하나님은 오죽할까?
그날 밤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면서 구주께서 우리를 얼마나 끈질기게 따라오시는지 기억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빨리 도망친다 해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신다. 아버지가 탕자인 아들을 향해 뛰어가듯이 우리를 향해 뛰어오신다. 누가 더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시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구주께서 너무나 집요하게 우리를 쫓아오신 나머지 ‘신인(God-man)’이 되셔서 이 땅의 복도 여기저기서 우리를 쫓아오신다.
거기서 멈추지 않으신다. 우리를 쫓아오시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완전한 생명을 우리의 죽음과 맞바꾸셨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었는데도 말이다(롬 5:8). 우리가 완벽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으셨다. 가난하게 되셔서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유하게 될 수 있었다(고후 8:9). 자유 의지로 (F를 받아 낙제한) 우리 시험지를 잡아 우리 이름을 지우고 그분 이름을 그 위에 적으신다. 그러고는 (그와 반대로 A를 받은) 흠 없는 시험지를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지운 다음 우리 이름을 적어 넣으신다. 어느 날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완벽한 성적에 우리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쫓아오셔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기를 바라신다(계 3:20). 왜 그러실까?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사 43:4).
나를 쫓아오시는 그분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1 가명이다.
2 의사를 의미하는 스와힐리어이다.
프레더릭 키마니 케냐 나이로비에서 고문 의사로 일하고 있다. 음악으로 젊은이들을 하나님께 이끄는 데 헌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