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경험
예수 나의 의
로마서에서 핵심은 3장 28절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마르틴 루터는 구절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믿음이라는 말에 ‘오직(alone)’을 더했다. 루터의 번역은 이렇다.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의 행위를 떠나 오직 믿음으로 정당화된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비록 ‘오직’이 그리스어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의 번역은 신학적으로 올바르다.
마르틴 루터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혹은 칭의는 교회가 세워지고 무너지는 계약 조항이다. 칭의, 즉 솔라 피데(오직 믿음)는 그를 위한 것이고 또 우리를 위한 복음이 되어야 한다. 이 기별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사명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1889년, 엘렌 화잇은 “100명 중 1명도…[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성경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1라고 기록했다. 오늘날 그녀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해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선택들
구원의 계획은 칭의, 성화, 영화라는 세 요소를 포함한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뒤 하나님에게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첫째, 그들을 죽게 버려두는 것이다. 이것은 자비 없이 공의를 이루는 일이었다. 둘째, 그들을 편히 용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공의 없이 자비를 이루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실 뿐 아니라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공의와 자비가 만나는 세 번째 가능성을 선택하셨다. 죄인들을 정죄하여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공의롭다. 예수님 그 자신의 인성 안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자비롭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살 수 있게 되었다(요 3:16). 이것이 좋은 소식, 복음이다. 하나님은 요구 사항이 아니라 선물, 용서의 선물을 우리에게 가지고 오셨다. 이는 “용서와 칭의는 하나이고 같은 것이기”2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이 선물을 받았다. 믿음은 이 선물을 받는 손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부여하시려고, 즉 우리의 것으로 셈해 주시려고 선택하신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의란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죄 없는 생애와 그분의 죽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입혀질 때 나는 다음과 같이 된다.
■ 그분의 생애가 우리의 생애로 여겨진다.
■ 그분의 선행이 우리의 행위로 여겨진다.
■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으로 여겨진다.
그분의 생애와 죽음이 나에게 부여되고 우리의 생애로 간주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는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에 더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마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고백과 회개를 통해서이다(요일 1:9).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 놀랍겠지만 심지어 우리의 회개조차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신 결과이다(롬 2:4).
예수와 율법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그분의 올바른 행함, 그분의 완전한 행함이다. 이는 그분이 완전하시기 때문이다(마 5:48). 결과적으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만을 하나님은 받을 수 있으시다. 그리스도 외에 어떤 인간도 이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그분은 말, 생각, 행위에서 완전하고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가 살도록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셨다.
이 완전한 순종 다시 말해 그분의 의,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의를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것이 우리에게 부여된다. 다시 말해 우리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칭의이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류 그리고 구원의 선물
그렇다면 구원의 계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전혀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라는 선물에 아무것도 더할 수가 없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지만 일단 그것을 지니게 된다면, 우리가 용서받는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그 의의 선물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것을 다시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가진 것을 굳게 잡”(계 3:11; 참고 히 3:14; 고전 15:1~2)고 “믿음에 거하”(골 1:23)라고 거듭 경계한다. 순종이 들어설 곳이 바로 거기다.
칭의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밖에서 행해진 일이다. 그것은 신분의 변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성화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성화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습관, 우리의 욕망, 우리의 품성을 변화시킨다. 성화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재창조하시고 우리를 하늘에 적합하게 하신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는 부여받은 의요, 성화하게 하는 의는 그리스도께서 나눠 주시는 의이다. 전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증서이며 후자는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우리의 적합성이다.”3
칭의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가 답이다. 성화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계속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예수를 통해 순종함으로’가 그 답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신다. 바로 여기서 믿음의 선한 싸움, 즉 구원을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붙잡기 위한 영과 육, 옛것과 새것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계획에서 둘 다 동등하게 중요한 요소이다. 자신이 의롭게 해 준 사람을 하나님은 또 거룩하게 하신다. 다른 요소 없이 또 다른 하나가 이루어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의 열매, 선행을 낳기 때문이다.
실제 사례
누가복음 18장 10~14절의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의존한다. 세리는 자신의 추악함을 인식했고 하나님이 그를 의롭게 하신다.
더 최근의 예는 존 뉴턴이다. 그는 18세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영국인 선장이었다. 노예 무역상이었고 많은 사람을 죄로 이끌었다. 한동안 그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살기도 했다. 인생의 가장 낮은 지점에서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셨고 존 뉴턴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고 많은 책과 노래를 지었다. 그는 찬미 ‘자비로운 주 하나님’으로 가장 유명한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경험의 표현이었다. “자비로운 주 하나님 날 구원했으니 내 잃었던 귀한 생명 이제야 찾았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사랑, 의의 선물이다.
이 메시지를 18세기에 존 뉴턴이 전했다. 1세기에는 바울이 전했다. 오늘날 우리도 전해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의의 선물 말이다.
게르하르트 판들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목사, 교사, 선교지 총무, 대총회 성경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했다. 미국 메릴랜드 버튼스빌에서 활동적으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으며 출석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있다.
1 Ellen G. White, in
2 Ellen G. White,
3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35
www.adventist.org/en/beliefs/에서 ‘무엇을 믿는가’ 칼럼을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