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이야기 속편
요나는 3대 일신교 신자 누구에게나 유명한 이름이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도망치는 선지자에 대한, 조금은 익살스런 이야기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언급하고 있다. 그가 커다란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간 장면을 각 시대의 예술가들이 묘사해 놓았다.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그의 이야기는 어린이 동화, 값비싼 모자이크, 벽화에도 소개되어 있다.
요나는 분명히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욘 3장). 이겨 먹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가 마침내 받아들이기까지 거친 바다의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지낸 경험 이상이 필요했더라도 말이다.
두 번째(혹은 세 번째) 기회에 관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가장 잘 보존된 그리스어 원문을 근거로 영어 성경 대부분에서는 외향적이고, 생각보다 말이 앞서는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가 요한이라고 소개한다(요 1:42).1 예수님과 베드로는 특별한 관계다. 그분은 베드로의 잠재력을 보시며 그를 자신의 최측근으로 삼으신다. 흥미롭게도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면서 제자인 그를 구약의 그 유명한 선지자 요나와 결부시킨다. 베드로는 막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언하였고 예수님은 “이를 네가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면서 그를 칭찬하신다. 베드로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번졌으리라고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잠시 뒤, 예수께서 자신의 고통과 죽음,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시자 베드로는 자신의 주인이신 그분을 붙들고 진지하고 단호하게 나무라는 투로 말한다(22절). 여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순응을 요구하는 매우 강한 용어다. “예수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극히 강경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23절). 즉 ‘유혹자 노릇 하지 마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일부러 ‘요나의 아들 시몬아’라고 말하시면서, 도망친 구약의 선지자를 연상시키는 매개체로서 베드로의 아버지 이름을 언어유희처럼 사용하신 것은 아닐까?2
세 번에 걸친 베드로의 부인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거부하고 도망친 요나와 연결 짓고 계신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로 향하고자 하지 않는다. 적어도 베드로의 생각에 십자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나처럼 베드로는 부활의 아침 사건 이후에 두 번째 기회를 얻는다(요 21:15~17).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말씀하실 때(요나의 이야기와 연관되는 또 다른 대목),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세 번 반복해서 들었다(행 10:16).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요나, 도마, 베드로, 마르다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두 번째 기회를 주는 데 전문이시다. 우리에게는 실망만 보이는 곳에서 그분은 잠재력을 보신다.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처할 때 그분은 새로운 시작을 제시하신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도망치려고 할 때, 그분은 자신의 선함과 인자함이 우리 평생에 ‘따를’ 것임을 참을성 있게 상기시켜 주신다(시 23:6). 우리는 그분을 떨쳐 버릴 수 없다.
1 ‘요한’은 ESV, RSV, NASB, NRSV, NIV, 기타 여러 역본에 나온다. 본 구절을 마태복음 16장 17절과 일치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한 사본에 기초한 KJV와 NKJV는 이것을 ‘요나의 아들’로 번역했다. 다음을 참고할 것. Barclay M. Newman and Eugene A. Nida,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80), p. 45
2 다음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Kevin J. Youngblood,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부편집인이며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두 번째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