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믿음
신앙을 찾아서
보통 사람보다 더 힘겨웠던 한 사람의 여정
마이클 체사넥
이집트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스리 귀르귀스는 콥트 정교회 신자 가정에서 자랐다. 2살 때 유스리의 부모는 그를 수도원으로 데려가 오른쪽 손목에 이집트 문화에서 믿음을 상징하는 십자가 문신을 받게 했다. 이 문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종종 견책과 무시를 받거나 자기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시인할 강단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삶은 쉽지 않았다. 이슬람 학교에 출석할 때 특히 그랬다. 유스리는 기독교 초등학교에 입학할 선택권이 없었고 정부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했다. 그리스도인 신앙 때문에, 유스리는 학교와 또래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다른 아이들은 유스리를 이상한 아이로 취급했고, 종종 놀리기도 했다. 그는 맞거나 살해당할 것 같은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집에서는 유스리의 부모가 그에게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었지만, 공립학교 제도는 학생들에게 코란과 이슬람에 대해 가르쳤다. 집에서는 기독교에 대해, 학교에서는 이슬람에 대해 배우면서 유스리는 삶과 영성에 대해 갈등과 혼란을 겪었다.
재림교인을 만나다
유스리는 이집트 아시우트의 가난한 마을에 살았다. 4살 때부터는 가족 사업인 건축업을 도왔다. 벽돌 쌓기, 시멘트 섞기, 돌 쌓기 등이 그의 일이었다.
일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유스리는 향수병이 생겼다. 그가 건축을 도와주고 있던 집은 재림교인 가정이었다. 어린 유스리가 집에 가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집주인은 유스리에게 비스킷과 음료를 주었다.
유스리는 그의 사랑과 너그러움에 고마움을 느끼며 이 집 사람은 뭔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이후 유스리는 그 집에서 일할 날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7살 때는 그 집주인의 친구인 또 다른 재림교인 가정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집의 아들 중 하나가 유스리의 형과 함께 공립학교에 다녔는데 나중에 카이로에 있는 재림교회 초등·중학교인 나일 유니언 학교로 전학을 갔다. 거기서 영어로 수업한다는 말을 듣고 유스리도 그 학교에 가고 싶었다. 관광 가이드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목표를 이루려면 영어를 제대로 배워야 했다. 하지만 유스리의 가족은 그 학교에 보낼 여력이 없었다.
공립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유스리는 다시 관광 가이드가 되겠다는 꿈이 되살아났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나일 유니언 학교에서 고등학교 2년 과정을 반복하기로 결정했다. 건축업으로 돈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스스로 수업료를 지불할 수 있었다.
반대에 부딪히다
학교 기숙사로 옮기고 몇 달이 지나 유스리는 반대에 부딪혔다. 가족이 종종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이 유스리의 전학 사실을 알고 나서 가족들에게 유스리가 그 학교에 다니면 영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아쉽지만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1년 뒤 유스리는 카이로에 있는 호텔관광대학에 합격했다. 그는 다시 나일 유니언 학교에도 등록했고 거기서 영어 수업을 들으며 대학 생활도 병행했다.
유니언 학교의 마이크 먼시는 종종 유스리를 예배에 초청했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먼시는 또 유스리를 집으로 초대해 성경을 가르치고 토론했다. 성령께서 조용히 역사하셨고 유스리의 마음에는 사랑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생겼다.
변화된 삶
어린 시절 유스리는 콥트 정교회의 금식 예식으로 채식주의 식단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는 유니언 학교에서도 채식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았고 건강 식생활을 해야 하는 성경적인 이유에 대해서 배웠다. 얼마 안 되어 엘렌 G. 화잇의 <치료봉사>를 우연히 접하여 네 번이나 읽었다. 그는 재림 기별을 믿기 시작했다. 먼시에게 성경 공부를 추가로 부탁했고, 9개월 뒤 침례를 받았다.
1년 더 공부한 다음 유스리는 안식일에 시험을 치르는 관광대학을 그만두었다. 이후 재림교회 이집트대회장을 찾아가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집트인이 그런 관심을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회장은 우선 유스리에게 문서 전도 기회를 제공했고 이후 그는 이집트-수단 선교지에서 부목사로 3년간 일했다.
2000년에 유스리는 레바논 베이루트의 중동 재림교회 대학 신학 과정에 등록했다. 2003년에는 짐바브웨의 불라와요의 술라시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고학생인 유스리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온갖 일을 해야 했는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늘 그에게 몇 가지 일감을 허락해 주셨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유스리는 나중에 아내가 된 조안을 만났다. 두 사람은 2년간 목사에게 성경을 배운 뒤 결혼했다. 유스리는 2006년에 신학교를 졸업했고 2007년에 조안은 벤저민을 출산했다.
사역을 결심하다
졸업 후 유스리는 술라시 대학교회 부목사 그리고 신학과 성서 히브리어 강사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자신도 일하면서 학업을 계속해 2008년에 종교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는 신학과에서 여러 구약 과목을 가르치는 전임 강사가 되었다.
극심한 식량 부족과 물가 상승을 겪고 있는 짐바브웨에서 사역하기란 만만치 않았지만 유스리는 그곳에서 계속 신실하게 일했고, 2014년에 박사 학위를 위해 필리핀 재림교회 국제대학원(AIIAS)으로 갔다. 등록금과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고 또 마지막 2년 동안은 대총회에서 지급하는 찬순(Chan Shun)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과 비용을 댈 수 있었다. 2018년 1월에 박사 논문 심사를 마쳤고 같은 달 태국 사라부리의 무악렉에 있는 태국삼육대학교(아시아-태평양 국제 대학교)의 종교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예수님을 위해 신실하게 살다
유스리는 학생들에게 재정 형편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부지런히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인 교육을 힘써 이루라고 격려한다.
“이것이 실제적인 그리스도교입니다.”라고 유스리는 말한다.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만 가능하고 그 삶이야말로 멸망해 가는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을 소개하는 열쇠랍니다.”
마이클 체사넥 미국 워싱턴주에 거주하며 레바논에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강사와 재림교회 출판소 교열 담당자로 일했다. 마라나타 봉사단의 교회, 학교 건축에도 열심이다.
갭션
20 유스리(왼쪽)의 아들 벤저민과 아내 조안
21 태국 무악렉의 아시아-태평양 국제대학에서 중급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는 유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