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과 그리스도의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
데니스 카이저
1888년 미니애폴리스 대총회는 재림교회 역사에서 발생한 수많은 갈등의 본보기이다. <사인즈 오브 타임스>의 젊은 편집자 엘럿 J. 왜거너와 대총회장 조지 I. 버틀러 간에 일어난 갈라디아서 3장 24절의 율법에 대한 충돌을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해설서, 갈등 해결을 위한 지침, 다양한 구원관에 대한 입문서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런 역동적인 갈등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신(新)신학?
1888년 대총회를 재림교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분수령으로 여기는 비평가들도 있다. 그 당시 총회의 회의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1888년의 진정한 메시지를 밝혀 내기 위해 왜거너와 그의 동료 A. T. 존스의 저술들을 연구했다. 총회 직후 젊은 목사들이 제시한 새 빛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엘렌 화잇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가? 그리스도의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을 나는 지난 45년 동안 줄곧 전해 왔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렇게도 여러분의 마음에 전해 주고 싶었던 것”1이라고 대답했다. 그녀의 관점에서 이 기별은 새로운 신학이 아니었다.
1883년 대총회에서 화잇은 설교를 14편이나 전했는데 이 설교들에서는 복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재림교회의 율법주의와 그 자연스런 결과로 일어난 의심, 두려움, 확신의 결여를 강하게 비판했다.2 그럼에도 왜거너와 존스의 기별을 신신학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는 데다가 이미 5년 전부터 화잇이 재림교회의 율법주의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보면 재림교회 목사와 교인 모두가 ‘그리스도의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을 선포하거나 전한 것은 아니라는 안타까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율법에 대한 상이한 개념들
1846년 이래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세 천사의 기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믿음을 지닌 자들(계 14:12)을 묘사한다고 발표했다. 율법의 영원성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했지만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초기 재림교인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조지프 베이츠는 순종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했지만3, 제임스 화잇은 회개, 용서, 순종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가능하게 된다고 강조했다.4
갈라디아서 3장에 언급된 율법의 본질에 대한 1850년대의 해석은 1880년대 논쟁의 밑바탕이 되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도덕법(십계명)은 거울로 제시되고 있으며 우리가 구주를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알려 준다고 주장하는 재림교회 저술가들이 더러 있었다.5 그런 입장은 갈라디아서 3장이 계명들의 폐지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여러 개신교의 견해에 가까웠다. 폐지된 것은 의식법이지 십계명이 아니라는 1857년 스티븐 피어스의 단호한 응답은 해당 본문에 대한 일반적인 개신교회 견해에 반대하는 더 나은 논증처럼 보였다.6 그의 논증은 이후 30년간 재림교인들의 표준적인 입장이 되었다.
오랜 시간 재림교회 목사들은 재림교회의 독특한 믿음에 대해서 다른 개신교회 목사들과 논쟁하는 일에 전문가가 되었다. 말을 듣다가 재림교회로 회심하는 이들도 생겼다. 재림교회 목사들이 성경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자주 논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 경쟁적인 토론들은 그리스도교의 공통 사항보다는 재림교회의 특수성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재림교인이 된 회심자 중에는 자신이 올바른 날을 준수하고 올바른 일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1880년대의 율법과 복음
적어도 1884년 이후부터 왜거너와 존스는 <사인즈 오브 타임스>와 힐즈버그대학교에서 이전 재림교회의 해석을 가르쳤다. 즉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갈라디아서 3장의 율법은 의식법이라기보다 도덕법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1880년대는 재림교인들에게 그 해석을 제시할 최적의 시기가 되지 못했다. 다른 개신교회들이 지역·주·국가적인 일요일 법령을 제정하고 강행하기 위해 정치 운동을 북돋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노력들이 미국인의 도덕성을 촉진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로마 가톨릭) 추기경 제임스 기번스가 국가적인 일요일 법령을 지지하는 일에 영향력을 더하자 재림교인들은 요한계시록 13장의 예언과 ‘짐승의 표’ 박해가 곧 실현되리라고 믿었다.7
갈라디아서 율법에 대한 왜거너의 해석은 해당 구절과 관련해 널리 퍼진 개신교회의 견해와 가까워 보였다. 따라서 왜 버틀러와 다른 이들이 왜거너의 ‘새로운’ 해석을 가장 힘든 시기에 나타난 그릇된 기별로 여겼는지는 이해가 간다.
갈라디아서 3장에 대한 피어스의 입장을 이정표적인 교리로 받아들인 버틀러는 이 문제를 자신이 막아서야 한다고 느꼈다. 먼저 그는 30년 전에 엘렌 화잇이 이 문제에 대해 왜거너의 아버지에게 보냈던 편지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그녀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화잇은 그 편지를 찾을 수 없고 만약 찾더라도 보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또 그녀는 왜거너에게 이 문제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들먹이지 말라고 타일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버틀러는 왜거너의 견해에 맞서 <갈라디아서의 율법(The Law in the Book of Galatians)>(1886년)이라는 책을 출간했고8 1886년 대총회 대표들에게 배포했다. 1886년 대총회를 마치고 두 달 뒤에 재림교회의 탁월한 목사 D. M. 캔라이트가 율법의 영원성을 거부하면서 왜거너의 주장에 영향받는 듯한 상황이 벌어지자 버틀러는 자기 생각의 정당성이 입증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로서는 유감스럽게도 엘렌 화잇은 버틀러의 행동을 견책했고 그가 자기 견해를 자유롭게 개진한 만큼 왜거너도 자신의 견해를 설명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왜거너는 2년이 지난 뒤에 <갈라디아서의 복음(The Gospel in the Book of Galatian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9
왜거너와 존스는 1888년 대총회 기간에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관한 각자의 관점을 제시할 기회를 얻었다. 병으로 참석할 수 없었던 버틀러는 자기 측근들을 준비시켜 이단으로 보이는 그 주장에 맞서게 했다. 엘렌 화잇이 보기에 그 회합의 진짜 문제는 신학적인 차이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버틀러 진영의 완고하고 적대적인 정신이었다. 그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었다.”10 두 젊은 목사가 전한 기별은 “귀한 사상” 즉 “우리의 공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부여받은”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냈다. 사탄은 이 기별이 전파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자기의 권세가 깨질 것이기” 때문이었다.11
두 율법 모두 그리스도에게로 이끈다
우리의 생각은 토론의 초입에 누군가 설정해 놓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 한계 때문에 그릇된 이분법이 형성되기도 한다. 어떤 주제에 빠져들다 보면 그 논쟁의 공허함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
수년 동안 교인들과 목사들은 상반되는 양자택일에만 눈길을 모았다. 갈라디아서 3장의 율법은 의식법 아니면 도덕법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후 엘렌 화잇은 그 논쟁의 한계를 깨는 놀라운 언급을 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초등교사”는 “의식법과 십계명의 도덕법 둘 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십계명이 우리를 구주가 필요한 죄인임을 보여 준다면 의식법은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지를 보여 준다.12
1888년 대총회 이후 얼마 안 되어 엘렌 화잇은 재림교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확실하게 받들었지만 “예수의 믿음은…그만큼 중요하게 선언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예수의 믿음이 “언급되기는 했지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러면 예수의 믿음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구주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자가 되셨다. 우리가 마땅히 당해야 할 것을 그분이 당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의를 취하도록 그분이 우리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취하셨다. 우리를 넉넉하고 충분하고 완전하게 구원하는 능력이 그리스도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예수 믿음이다.”13
1 Ellen G. White, manuscript 5, 1889, in Ellen G. White,
2 Published intermittently in the
3 Joseph Bates, (New Bedford, Mass.: Benjamin Lindsey, 1849), pp. 60~66
4 [James White], in Present Truth, August 1849, p. 16.
5 J. N. Andrews, in
6 S. Pierce, in
7 W. W. Whidden,
8 G. I. Butler,
9 E. J. Waggoner,
10 Ellen G. White letter 50, 1889, in Ellen G. White,
11 Ellen G. White, in
12 Ellen G. White manuscript 87, 1900, in Ellen G. White,
13 Ellen G. White manuscript 24, 1888, in Ellen G. White,
데니스 카이저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역사학 부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