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분을 깨닫다
성경 해석을 위한 간추린 지침서
제럴드 A. 클링바일
성경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믿지 못할 이야기가 가득한 또 하나의 옛날 책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희망을 불어넣는 성경 메시지에 감동받는 이도 있다. 기독교인들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나오는 그리스어 ‘세오프뉴스토스’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성경을 영감적인 책, 다시 말해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신’ 책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이 말씀은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벧후 1:21)과 같으며,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말한(그리고 나중에는 기록한) 선지자들이 전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이야기는 번역과 해석이 필요하다. 성경은 히브리어, 아람어,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됐다. 저자들은 우리보다 수천 년 앞선 시대의 매우 다른 문화와 다양한 역사적 환경에서 살았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기록한 것뿐 아니라 그들이(그리고 그들을 감동시킨 성령께서) 뜻한 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성경 해석학 입문
성경을 그릇 해석하지 않으려면, 성경 해석의 원칙과 규칙에 유의해야 한다. 학자들은 이 분야를 ‘해석학’이라고 부른다.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원칙들을 인식하고 있다. 종교 개혁의 슬로건인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는 성경만이 우리 삶에서 진리의 최종적인 규범임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영감 받은 진리를 찾을 때 전통이나 우리의 생각은 무의미하다. ‘토타 스크립투라(성경 전체)’는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이다. 신구약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으므로 완전한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가들은 성경의 동일성 또한 강조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만약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면 성경 모든 곳에서 근본적인 통일성과 조화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통일성과 조화는 성경이 그 자체의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특정 문제나 주제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싶다면 해당 주제에 대해 성경이 언급하는 부분을 전부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마지막 원칙은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2:11, 14). 오래전 마르틴 루터가 언급했듯,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는 빈털터리의 심정으로 성령의 조명하시는 능력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 동시에 유쾌하게 한다. 수 세기 전 연약한 선지자들이 기록한 말씀에 생명을 불어넣으신 성령이 똑같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인식하기에 우리는 겸허해진다. 동시에 성경을 깊이 팔수록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어디서든 다시 대면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에 우리는 유쾌해진다.
문맥, 문맥 또 문맥
재림교회는 항상 역사적-문법적(역사적-성경적) 해석 방법을 사용했다. 이 방법은 이미 언급한 기본 원칙에서 발전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성경 자체의 증거는 받아들이지만 본문의 언어, 구문,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 본문과의 만남은 모두 번역에서 시작된다. 우리 대부분은 히브리어, 아람어, 코이네 그리스어로 읽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번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철저한 성경 연구와 해석을 위한 훌륭한 전략은 번역서를 비교하는 것이다. 제임스왕역을 포함하여 모든 번역에는 해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의 번역도 유용하지만 항상 더 나은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양한 번역본을 읽는 편이 성경 본문 이해에 더 도움이 된다.
성경을 읽을 때 문맥은 열쇠와도 같다. 문맥의 단계는 다양하다. 먼저 각 구절에는 인접한 문맥이 있다. 특정 구절의 앞뒤를 둘러싸고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그 구절의 이해를 돕는 절들을 말한다. 더 넓은 범위의 본문은 그다음 단계의 문맥에 해당한다. 이것이 장의 구분과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사 52:13~53:12이 그 분명한 사례다.). 여러 장이 한데 모여 더 큰 기본 단위를 이루기도 한다. 창세기 1~3장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와 인간의 심각한 타락을 알려 준다. 이어지는 장들은 인류의 번성과 개발에 관한 정보이며 그다음에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대홍수(창 6~10장)가 뒤따른다. 이 부분을 한데 묶어서 읽으면 문맥에서 벗어나는 문제를 막을 수 있다.
그다음으로 더 큰 문맥은 성경 전체이다. 성경 기자들은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성경(내용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대로 받아쓴 결과물도 아니다. 건축가가 집 설계도를 펼쳐 놓은 듯 명확한 구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의 기별을 전할 때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했다.
주어진 본문의 직접적인 맥락과 더 큰 맥락을 이해했다면 기록 연대와 기록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요나의 예언적인 책은 허공에서 툭 튀어나온 게 아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침입과 다른 외부 위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비교적 평온했던 순간들은 종종 심각한 국가의 위기와 번갈아 가며 나타났다. 이러한 배경을 알면 요나의 행동과 그의 감정까지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찾아서
그러나 성경 해석은 역사, 문화, 언어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이 땅에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우리는 더 잘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성경 본문이나 장을 읽으면서 ‘이 본문이나 장이 하나님과 그분이 성품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학의 본질이며 여기에는 그 어떤 학위도 필요하지 않다.
가끔은 그 답을 간단하게 얻기도 하지만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고 더 광범위한 스토리에 주목해야 할 때도 있다.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출애굽기 34장 6~7절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답한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은혜롭고 인자하시고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심각하게 다루는 의로운 재판관이시라고도 알려 준다. 성경의 예상치 못한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나의 삶은?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문적인 수련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계획을 전하는 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 글을 접할 때는 실존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활약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매우 기본적이면서도 사적인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사는 오늘 나의 삶에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파서 얻은 성경 진리를 실천하려면 결심이 필요할 때가 많다.
이 결심은 “내 백성아 어디 있느냐? 돌아오라.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리니!”라며 하나님이 자기 피조물들에게 끊임없이 던지시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제럴드 A. 클링바일(D.Litt.)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다. 하나님의 두 말씀, 즉 기록된 말씀과 육신이 되신 말씀에 열정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