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경청
빌 노트
성경을 읽는 법을 배우기 전에, 어린애 같은 눈과 마음으로 책장에 인쇄된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을 알기 전에 나는 먼저 귀로 성경 말씀을 들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안식일 오후, 우리가 살던 도시의 식물원에서 아버지는 붉게 타오르는 텍사스 하늘의 석양을 배경으로 실루엣을 드러내 떡갈나무 아래에 가족들을 불러 모으곤 하셨다. 나는 붉은 개미와 진드기로부터 보호해 주는 까슬까슬한 담요를 덮고, 아버지께서 중후한 목소리로 시편을 낭독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반세기가 넘었지만 지금도 나는 시편 103편을 펼 때마다 그 말씀이 ‘들린다.’ 장면은 아른거리지 않을 때가 많아도 소리가 주는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서 문해력(文解力)이 향상하면서 우리는 말씀을 읽는 각자의 능력을 적절하게 향유하고 있다. 학교에서 하듯 본문의 시각적 구조를 연구하고, 절과 절을 비교하고, 진리에 진리를 더한다. 재림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글을 읽는 능력 그리고 성경 연구를 향한 개인적 헌신의 책임과 기쁨을 가르치는 일이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성서공회에서는 “글을 읽지 못하면 말씀도 읽지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소리가 되어 우리의 귓전에 쟁쟁하게 울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는 말자. 자애로운 누군가가 큰 음성으로 읽어 주는 그 소리,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그 소리는 우리를 잠잠케 하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어루만져 준다.
모세오경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거의 대부분은 소그룹에서, 집이나 교회에서 혹은 공중예배 장소에서 읽고, 낭독하고, 큰 소리로 노래하도록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교훈과 설교를 기록하지 않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자신의 언어로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눈으로 페이지를 훑는 동안 그분의 음성 듣는 능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바울과 베드로가 교회에 편지했던 것은, 듣는 이들과 함께 나눈 개인적 친분을 표방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서신들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글쓴이와 그 글을 신실한 신자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 주는 사람 모두에게 성령께서 감동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이다.
20세기 전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제 공중집회에서 개인적으로 다시 성경을 큰 소리로 읽어 보자. 그래서 요한이 일곱 번이나 반복했던 권고를 우리 삶에서 실현하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성경에 충실한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