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발자취
‘열방의 의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유대인들을 구한 재림교인이 있었다.
예루살렘 바깥 외곽, 6백만 유대인들을 위한 야드바솀 홀로코스트 기념관 근처에 고요한 정원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박해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원한 비유대인을 기념하여 나무들을 심어 놓은 곳이다. 각 나무에는 ‘열방의 의인’에 대해 말해 주는 이름표를 달아 경의를 표하고 있다. 헝가리 재림교회 목사 라슬로 미츠흐너이(1893~1965)를 기념하는 나무도 심겨져 있다. 그는 유대인 50여 명이 홀로코스트를 피하도록 도와준 용감한 그리스도인 지도자이다.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은 극소수였어요.” 미츠흐너이 목사의 딸, 머그더 베르젠츠제이는 나치의 통치 기간에 유대인을 도운 재림교인들을 언급하며 회상에 잠긴다. “그래요. 몇 사람이 있었어요. 하지만 더 있어야 했어요. 더 많이 그래야 했어요.”
‘재림교인 발렌베리’로 역사에 족적을 남긴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녀는 더 들려주었다. 스웨덴 외교관이었던 라울 발렌베리,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지만, 헝가리에서 유대인 수천 명을 보호했다고 알려져 있다. 미츠흐너이 목사와 발렌베리는 서로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고 나치의 잔혹함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같은 사명을 맡았다.
편견 앞에 두려움 없이 맞서다
헝가리의 유대인들은 뉘른베르크법에 견줄 만한 1941년의 인종법으로 점점 증가하는 차별과 맞서야 했지만 독일 주둔에 직면하여서도 비교적 안전했다. 나중에 미츠흐너이 목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유대인 언론인 빌모시 메죄피는 두려움을 모르는 재림교인 목사가 부다페스트의 가장 큰 재림교회에서 1943년에 ‘유대인 문제’에 대해 회중 앞에서 설교했다고 회상한다.
청중 수백 명 중에는 사복 경찰들도 있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미츠흐너이 목사는 설교 단상에서 외쳤다. “여러분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유대인들을 여러분의 보호 아래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충성되고 정직한 추종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는 재림교인들 사이에 퍼져 가며 점점 자라고 있는 반유대주의적 감정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 유대인은 부다페스트 인구의 16퍼센트였다. 헝가리 재림교회는 과거 수많은 유대인 회심자를 받아들였다.
인상적인 설교 후 경찰의 소환장도 미츠흐너이 목사를 위협하지 못했다. 광신적 지도자, 살러시 페렌츠의 지도하에 히틀러 극우파인 화살십자당이 호르티의 정권을 전복하고 헝가리의 유대인 수천 명을 죽음의 나치 수용소로 수송하려고 준비할 때인 1944년 10월, 미츠흐너이 목사는 유대인 구조를 위해 은밀한 관계망을 구축하기로 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였던 그의 신실한 아내 욜란은 전적으로 남편을 지지했다.
목사의 구출 작전의 중심에는 유대인 거주 지역 근처 세켈리 베르털런 거리에 위치한 재림교회 건물이 있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목사는 지하 저장고, 다락, 계단 아래, 단상 뒤 등과 같은 다양한 작은 공간, 복도 그리고 건물의 구석진 곳에 수많은 유대인을 ‘U 보트’라는 코드명을 붙여 숨겼다. 유대 가문의 재림교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어떤 차별도 없었다. 미츠흐너이 목사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누구나 도우려 애썼다.
게슈타포가 비밀스럽게 지켜보고 있었지만, 다행히 지역 헝가리 경찰관들이 교회 건물의 문을 두드렸다. 독일 경찰들이었다면 더 철저하게 수색했을 것이다. 초청하지 않은 방문객이 문 앞에 나타날 때마다 목사는 그들과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어 건물 안에 피신한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냈고 숨을 곳을 찾도록 시간을 끌었다. 헝가리 경찰관들이 의심스러운 정황에도 항상 교회를 철저히 수색하지 않고 지나친 이유는 아마 미츠흐너이 목사가 초기에 살러시와 친분이 있었던 점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활동 범위를 넓히다
완전히 다른 성격의 소유자인 미츠흐너이 목사와 화살십자당의 지도자 살러시는 원래 학교 친구였고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 미츠흐너이 목사는 남을 즐겨 도왔고 살러시가 나치 지도자로 경력을 쌓기 전부터 그가 범죄 활동에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간의 돈을 주었었다. 이 돈은 재림교회 선교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하던 미츠흐너이의 딸 머그더에게 주는 급료에서 제한 것이었다.
미츠흐너이 목사는 재림교회에 더 이상의 유대인을 숨길 수 없게 되자, 약 30명의 ‘U 보트’들을 위해 부다페스트 밖에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았다. 그중에는 바모시 가족도 포함됐다. 미츠흐너이는 바모시 가족을 부다페스트 외곽에 사는 이스트만 올라 재림교회 목사에게 넘겼다. 올라 목사는 미츠흐너이 목사와 긴밀히 활동하며 자신의 아파트에 유대인을 숨겼다. 며칠 뒤 바모시 가족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다페스트 북쪽 셰이체의 바츠에 사는 재림교인 농부, 이므레 퇴뢰크의 집에서 숨을 곳을 찾았다.
미츠흐너이 목사는 나중에 헝가리연합회의 재무부장이 된 아르파드 로즈를 부다페스트에서 북동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 미슈콜츠에 있는 치과의사 지그몬드 치키의 집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로즈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나치의 테러에서 살아남았다.
미츠흐너이 목사의 딸, 머그더는 1925년에 태어났는데 뒤에 남아 부다페스트에 있는 교회에 숨어 있었다. 살아남은 증인인 머그더는 교회 건물에서 몹시 힘들게 지냈던 지하 생활에 대해 말해 주었다. 발각에 대한 우려, 비좁은 공간, 장시간 꼼짝 못하는 트라우마, 계속되는 목마름과 배고픔, 목숨을 걸고 돕는 이들에 대한 계속되는 염려 그리고 얼마나 오래 지하 생활을 이어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무서운 의문 등과 싸워야 했다.
미츠흐너이 목사는 유대인 구조 활동에서 대담함, 조직적인 기술뿐 아니라 창의성도 보여 주었다. 1944년 가을, 목사는 딸 머그더의 약혼자, 카롤리 베르젠츠제이에게 수공업자로 변장하고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어린 유대인 소녀, 유트카 홀츠제르를 몰래 데려오라고 했다. 머그더가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카롤리는 어린 소녀를 배낭에 넣어 유대인 거주 지역을 빠져나왔다. 그 위험천만한 계획은 성공했다.
위기 가운데 보여 준 용기
미츠흐너이 목사의 구조 활동은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용감한 재림 성도들의 온전한 지원과 지지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의 모본을 따르면서 교회 안팎의 수많은 방관자와 무서운 감시자들의 실상을 드러냈다. 그들의 용기 있는 증언은 과거의 실수를 우리가 되풀이하지 않도록 또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인간적 비극을 잊지 않도록 해 준다.
라슬로 미츠흐너이처럼 유대인을 돕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어야 했다.
다니엘 하인츠(Ph.D.) 독일 프리덴사우에서 유럽 재림교회 역사 기록 보관소 소장이다.
발문
용감한 지도자 라슬로 미츠흐너이의 도움으로 유대인 50여 명이 홀로코스트를 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