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삶을 지지한다
낙태 찬반에 대한 개인적 단상
최근에 크게 화를 내 본 적이 있는가?
분노한 이들의 댓글 폭탄 없이는 소셜 미디어나 뉴스를 보기가 상당히 힘든 세상이 됐다.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분노가 커질수록 조회 수와 공유자 수는 늘어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분노가 욕설이나 더 심한 상황으로 변할 때가 많다. 분노를 키우는 메아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세상은 움츠러든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아니라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 간다. 도덕적 우월감을 강하게 느낄 수는 있겠지만, 원인에서 결과를 유추하고 큰 그림을 보는 능력은 잃는다.
분노의 도가 지나친 세상이지만 어쨌거나 분노를 촉발하는 문제를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낙태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낙태라는 말을 들으면 아기, 살인자, 탐욕스러운 의료 제도, 방탕하게 살면서 그 결과는 피하려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반대로 유년기를 벗어나기도 전부터 이용당하고 학대당하고 원치 않는 임신의 고통과 수모 속에서 빈곤과 외로움을 겪으며 가능성도, 발언권도, 선택권도 없는 삶을 떠맡은 여자들의 기구한 사연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낙태라는 말을 듣고서 잊고 싶은 무언가가, 수년간 비밀로 간직해 왔던 비밀이,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는 희뿌연 고통이, 영혼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된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를 것이다.
어조를 바꾸자
분노한 이들의 아우성이 혼란하게 들끓는 세상에서 나는 다르게 접근하고 싶다. 원인이나 권리, 심지어 올바름에 대해 소리를 높이고 싶지 않다. 나는 삶을 지지하고 싶다. 그 아우성을 벗어나서, 삶이란 내 경험에 따르면 어지럽고 심히 복잡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죄를 묻거나 양심을 내세우고 싶지 않다. 나는 친구가 되고 싶다. 우리에게 자기 생명을 선물로 주신 분을 창조주로 믿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비록 이 땅에서는 힘든 일이 생길지라도 삶은 아름다운 것이며 또 영원히 계속될 더 완전한 삶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 태어난 아기, 소녀, 여성, 소년, 남성, 남녀 노인들의 삶을 지지하고 싶다. 그들 각자가 단지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보듬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길 바란다. 하나님의 계획은 번성하는 것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는 분노하면서가 아니라 희망을 퍼뜨리면서 삶을 지지하고 싶다. 희망은 세상을 네 편 내 편으로 갈라놓는 좁은 안목이 아니라 날개를 달아 준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가 귀를 기울이고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가 처한 상황이 본인의 선택이든지 환경의 영향이든지 상관없이 그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분을 소개하고 싶기 때문이다.
삶을 지지하면서 나는 이 일이야말로 곧 삶의 과업임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어디서 피켓을 흔들거나 남의 소셜 미디어 여기저기에 보란 듯이 댓글을 적어 올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안건에 열을 내자는 것도 아니다. 매일 아침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생명의 근원이신 분과 의식적으로 소통을 시작하는 것이 곧 삶을 지지하는 일이다. 그분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나는 기도할 것이다.
그런 다음 집안에서부터 삶을 지지하는 일을 시작하고 싶다. 부부 사이, 가정생활에서 헌신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보여 주어서 말을 하든 안 하든 아이들이 삶이라는 선물과 책임감을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고 싶다. 아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한 추억을 간직해 가면서, 현명한 선택을 이끄는 역할 모델을 만나면서 자라게 하고 싶다. 생명 창출의 영광에 동참하는 사랑 어린 결혼을 할 수 있기까지 아이들이 기다림을 선택할 줄도 알기를 나는 기도한다. 심지어 다른 선택을 하고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요인이 되어 주겠다.
가정 너머
삶을 지지하는 일은 집 밖에서도 실행해야 한다. 곳곳에 절망이 엄습해 있다. 책임 소재를 논할 필요는 없다. 삶을 파괴하는 습관과 생활 방식을 정상화하려고 처절하게 애쓰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그만큼 채우고 싶은 공허함이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규탄할 대상을 찾자면 나부터 해당될 것이다.
혹시 나는 건강하지 않은 생활 습관으로 삶의 질을 파괴하고 수명을 단축시키지는 않는가? 끊지 못하고 중독에 빠져 버린 것은 없는가? 내가 사용하는 말은 어떤가? 삶을 북돋는가? 아니면 평판과 희망을 잃게 하는가?
삶을 지지하는 일은 호수에 조약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그 파장은 확산된다. 이론에 머물지 않고 금세 교회와 지역 사회에서 실행된다. 핵심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게 한다. 파탄 난 가정과 환경에서 지낸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사귀고 보살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알고 지내는 싱글맘을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 남자아이들은? 아이들이 경건한 남자에 대한 역할 모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멘토 프로그램을 내가 후원해 줄 수 있을까? 관계와 친밀감을 파괴하는 음란물의 홍수를 어떻게 막아 낼 수 있을까?
그렇다. 내가 삶의 지지자 노릇을 언제나 제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일에 얽히기 싫어서 깔끔하게 포장된 대답으로 얼버무릴 때도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바로 지금 삶을 지지하는 일에 전념하고자 한다. 삶의 한 조각, 삶의 첫 단계, 삶의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삶 자체를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따르는 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섄털 J. 클링바일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소 부소장이며, 미국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나는 분노하면서가 아니라 희망을 퍼뜨리면서 삶을 지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