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의 회복
가족 편지, 크리스마스카드, 페이스북 게시물에서 그들은 미소를 짓고 있다. 모두 무언가 즐거운 일, 빛이 어둠을 이긴 순간을 신나게 알려 주고픈 모습이다.
각 게시물과 편지에서는 졸업, 첫아이(손주) 출산, 결혼, 입사 등 누군가 처음 경험한 환희를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려고 한다. 4살배기 아이가 머리에 생크림을 묻힌 사진, 결혼식 날에 늘씬한 젊은 한 쌍이 해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보면 미소가 절로 나온다. 이 모두는 타인의 행복이 재빠르고 미묘하게 나의 행복으로 변하는, 살맛 나는 순간들이다. 이것들은 사랑하는 이들과 우리를 묶어 주는 간편하고 단순한 관계망의 일부이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어둡고 힘든 선택의 연속일 때, 부부가 불임으로 고민하고, 나이 여든이 넘어 기억이 오락가락하고 질병과 싸워야 할 때, ‘살맛 나는 것’이란 무엇을 뜻할까? 증오로 이슬람 사원이 날아가고 폭력이 시장에 난입하고 가족이 무고하게 비명횡사할 때 소망의 백성이란 무엇을 뜻할까?
이런 때야말로 우리의 신앙이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들이다. 만사가 순조롭고 하늘이 푸르기만 한 순간, 손주들의 재롱에 웃고 결혼식에서 젊은 시절의 사랑을 떠올리는 순간이 아니라 스스로 보기에 또는 이웃의 눈에 우리 자신이 “그늘에 앉은 자들”(마 4:16)로 비치는 순간 말이다. 우리는 진정 이 시대를 위한 ‘빛의 전달자’들인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라고 선포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살맛 나게 하는 운동의 주인공이 되려면 우리의 이상과 헌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태아의 삶, 우리 가족뿐 아니라 도처에 있는 어린이의 삶, 부서지고 혼탁한 세상에서 거처를 찾는 십 대의 삶, 노년 부부와 젊은 부부 모두의 삶, 나이 먹어 건강과 기억에 장애를 겪는 이들의 삶을 지지해야 한다. 손쉬운 즐거움과 웃음을 얻는 일에만 안주하는 것은 당치 않다. 죽음과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서 삶에 대해, 빛에 대해 확신을 주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우리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5절, 표준새번역). 이 세상 어둠의 모든 세력이 이기고 짓눌러 버리려고 했던 그 생명, 그 빛은 지금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분은 생명을 건 고통의 쓴 잔을 남김없이 다 마셨고 영원한 나라가 자기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탄력’이 우리의 좌우명이다. ‘부활’이 우리의 주제이다. 우리는 영원한 복음을 전한다. 그 기쁜 소식은 지금도 상한 자를 고치고, 슬픈 자를 위로하고, 넘어진 자를 일으키며, 그분의 나라가 마침내 완전하게 임할 때까지 그 나라의 가치를 옹호한다.
내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살맛 나게 하는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