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주의라는 독
부족주의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전 세계적으로 부족주의(tribalism)가 증가하는 모양새다. 이러한 추세는 삶의 여러 국면에 특히 윤리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세계 곳곳의 저술가와 비평가들은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의 정치적 분극화, 인도의 이슬람 차별, 유럽 정치계의 반이민 정서도 부족주의의 산물로 본다.
이렇듯 부족주의는 특정 지역이나 원시 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부족주의는 소속 집단을 위해서는 확고한 충성심을 발휘하지만 대개 타인과 타 집단에는 해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기술과 소셜 미디어에 힘입은 세계화로 문화적 획일성이 실현되는 반면 부족주의라는 위험한 지하 세력 때문에 연합보다는 양극화가 발생한다. 정치적 견해, 사회적 수사법, 종교적 담론에 반영된 근본주의의 단계적 확대는 좌파와 우파,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분열을 초래한다. 이로 인해 사회 화합에 필수적인 요소인 소통과 협력이 와해된다.
공동체를 위한 우리의 요구
인간은 존재와 소속의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집단에 가입하려는 자연스러운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욕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목표, 요구 사항, 희망 사항이 같은 사람끼리 공동체를 형성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자연적 욕구다. 문제는 다양한 견해, 의견 혹은 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몰아내려고 할 때 부족주의가 독이 된다는 것이다. 타인을 적으로 여기는 생각이나 미국, 뉴질랜드, 이스라엘,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집회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반유대주의, 반이슬람 세력들이 무고하게 죽이는 상황에서 부족주의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는 결과적으로 가해자들과 견해가 다른 정치인들의 죽음을 초래했다. 소셜 미디어에서 이러한 상황이 확산되면서 지금이 부족주의 시대라고 믿는 이들도 있다.
안타깝게도 숭고한 도덕적 이상과 하나님의 명령을 받드는 재림교회조차 부족주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고 있다.
얼마 전 어느 지역 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있다. 최근에 정부에서 치른 선거로 재림교인 다문화 가정 사역에 불화와 위기가 닥친 지역이다. 두 부족 간의 문화적 긴장을 부추기는 정치적 교착 상태는 굳건한 믿음과 기독교 유산을 공유한 부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내 친구의 경우를 이야기해 보자. 그는 2015년 샌안토니오에 열린 대총회 총회 기간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아프리카인 복장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내 친구는 당시 대총회 총회 대표자도 아니었는데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당신들은 여성 목사 안수에 반대표를 던졌잖소.”
나아갈 길
부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재림교회는 부족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
먼저 부족주의가 인간의 기본 방식임을 기억하자. 여러 연구에 따르면 아무도 인종주의자, 부족주의자, 근본주의자로 태어나지 않지만, 사회화 과정에서 관찰을 통해 아이들은 정체가 다른 이들을 부정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습득한다. 대개 어릴 때는 자기처럼 보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사람답게 대하고, 정체가 다른 이들은 하찮게 여기는 법을 배운다.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면, 사회는 정체성이 다른 이들에게 ‘개’, ‘벌레’, ‘쥐’, ‘해충’과 같은 꼬리표를 붙이고 비인간적으로 취급하도록 가르친다.
슬프게도 인류 역사에는 부족주의가 묵인되고 기독교에서 이러한 비정상적인 생각들을 장려했던 순간이 많다. 미국의 노예 제도,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을 보라. 애석하게도 기독교가 부족주의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연루된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족주의를 일절 반대하는 원칙을 가르치셨다. 부족주의의 중심 전제(우월성, 특별한 신분, 자부심 등)는 그분의 가르침과 모본 앞에서 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종, 출생, 특권, 지위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핵심 가르침이다.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요건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거듭남이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또 인종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마 5:9)다고 하시면서 배척이 아닌 포용의 복음, 전쟁과 편협이 아닌 평화와 관용의 복음을 설파하셨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삶을 통해 입증된 연합으로 세상이 복음의 힘, 그분의 왕국의 시민을 알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제자들의 출신 배경, 개성, 정치 성향은 다양했다. 마태는 경멸당하는 세리였다. 시몬은 열심당원, 정치 운동가 혹은 혁명가였다. 정치적 종교적 신념에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삶과 사역으로 이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한데 묶었고 양극화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협력, 선교, 봉사하게 이끄셨다.
재림교인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모래 위에 선을 긋고 세상을 ‘네’ 편과 ‘내’ 편으로 갈라놓아 분리의 장벽이 생기는 순간에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막 9:40)임을 잊지 말라고 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분의 왕국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자, 주인이나 노예 사이에 차별이 없다는 점을 신자들에게 상기시켰다. 아나니아가 침례를 주려고 자신에게 찾아와 종교적 테러분자인 자신을 “형제 사울”(행 9:17)이라고 불렀을 때 바울은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
사도행전에서는 우리 모두가 체득해야 할 두 가지 강력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성령께서 존경받는 교회 지도자들과 아나니아(9:10~17), 베드로를 이끌어 십자가 앞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세속 사회의 가치관을 뒤집어엎는다.
우리의 신앙 공동체에서 부족주의라는 해독을 없애려면 먼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떻게 부족주의를 지지하고 촉진했는지 짚어 보고 회개라는 선물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 앞에 참회의 무릎을 꿇고, 지난날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을 돌이키도록 새 마음과 새 본성을 달라고 구해야 한다. 부족 집단이라는 벽에서 나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문화 저항적 원칙을 실천하고 전하면서 장벽을 허무는 선교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으로 ‘부족’이라는 장벽을 뚫고 그리스도의 인류애에 동참케 하자. 자신의 오만, 배타주의, 우월감, 부족 정체성을 버린다면 우리는 아무런 장벽 없이 각 족속, 언어, 나라, 백성으로 구성된 종말적 공동체를 이루어 유리 바다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나날이 어두워지고 양극화되는 지금, 교회가 나서서 세상에 보여 줘야 한다. 장벽도 계급도 없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그리스도의 교회, 참된 공동체가 진정 무엇인지를 말이다.
켈빈 오농하(Ph.D.) 케냐 나이로비 근처에 있는 아프리카 재림교회 대학 부교수이다.
발문
기독교가 부족주의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연루된 경우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