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전파된 재림 기별
복음의 언어를 배우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북미에 초석을 다지면서 초기 지도자들은 사업을 해외로 확장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870년대에 존 네빈스 앤드루스는 스위스 바젤로 건너가 출판소를 세웠다.
영국과 미국 사이의 강한 유대 관계를 알고 있던 앤드루스는 그 점을 활용해 영국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그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은 아니었지만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곳에 약간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낯선 메시지를 전하려면 대표적인 사업이 필요하다고 앤드루스는 생각했다.
영국은 1851~75년의 빅토리아 중기 시대 동안 농업입국주의에서 산업주의로 점차 넘어가는 사회적‧정치적 재조정기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한 나라의 정치·경제 분위기는 종교적 열성에 영향을 준다. 종교적·도덕적 행동의 선봉으로 알려진 영국이 그랬다. 영국은 앞장서서 세계 곳곳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사업의 시작
교회는 안수 목사 존 노튼 러프버러를 전임 선교사로 영국에 보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뉴욕을 출발해 1878년 12월 30일에 사우샘프턴에 도착했다.
러프버러(1832~1924)는 거의 30년간 목사로 일했고 미국 중서부에서 존경받는 선구자로서 복음 전도를 위해 최초로 천막을 사용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재림교회 사업을 시작하여 3년 만에 교회 다섯 곳을 세웠다. 그는 미시간합회장으로, 대총회 재무로 일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이 영국의 사업을 위해 그를 준비시켜 주지는 못했다.
러프버러는 영국에 도착해 엿새 뒤 자유복음교회의 초청을 받아 실리 홀에서 자신의 첫 번째 설교를 했다. 150여 명이 참석했다. 그는 이어진 몇 주 동안 그곳을 빌려서 15차례 강연을 했다. 러프버러는 열심이었다. 공중 집회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또 미국에서 자신에게 가장 익숙했던 복음 전도 방식인 천막 집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전통적이지 않은 복음 전도 방법
1879년 4월, 러프버러의 주요 복음 전도 방식은 사우샘프턴과 영국의 다른 지방에서는 새롭고 독특한 방법이었다. 자신의 일기에 러프버러는 이렇게 기록했다. “봄이 시작될 때 우리는 높이가 20미터에 이르는 천막을 구입하고 조립해 사우샘프턴 교외에 세웠다. 그리고 1879년 5월 18일 일요일에 집회를 시작했다.”1
첫 집회에 청중 600명이 모였다. 집회가 진행되는 3개월 동안 날씨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참석자 수는 비교적 양호했다. 집회가 마쳤을 때 사우샘프턴의 신자들은 대략 30명이 되었다. 이들은 다른 교파의 교인이거나 새로운 회심자들이었다.
일할 사람이 부족했다. 안수 목사 한 명과 평신도 일꾼 두 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수고했고 1년이 지난 뒤 첫 번째 침례식을 거행했다. 러프버러의 일기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우리의 첫 침례식이 1880년 2월 8일, 사우샘프턴에서 있었다. 여섯 명이 자원하여 침례를 받았다. 1881년 7월 2일까지 29명이 침례를 받았다.”2
더딘 발전과 한정된 자원
어떤 이들은 러프버러가 수고한 결실이 그리 좋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공중 집회에 참석자들이 많았고 안식일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지만 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주저했다.
러프버러는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는 영국에서 사업을 진행할 때 미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났다. 영국 사람에게는 미국에서 사용한 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3 침례자 수는 들어간 긴 시간과 노력에 비해 적어 보였다. 미국에서의 성공에 비해 발전이 없어 보이자 러프버러는 자연히 낙담했다. 한편으로 그는 당면한 문제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중 하나는 천막 집회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상류층에게 호소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천막은 가난한 사람들이 즐기는 서커스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임시로 만든 조잡한 나무 의자, 예술적인 세련미나 예의가 부족해 보이는 천막은 사회 지식층과 교양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러프버러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그 점을 인정했고, 중상층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근사한 홀을 구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장소 임대비였다.
예산이 빡빡하고 재정은 한정적이었으므로 러프버러와 그의 작은 평신도 팀은 미국의 성금을 후원받는 동시에 현지에서 온갖 방법으로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팀원들은 『현대 진리』의 무료 샘플을 전하고 네 번을 무료로 보내 준 뒤 구독 신청을 받았다. 구독을 통해 모은 돈으로 직원을 채용하고 장비를 구입하고 잡지와 전단지를 추가로 제작했다.
위기를 극복하다
자신이 외국인이고 친숙하지 않은 교리를 가르친 탓일 수도 있는 미흡한 반응을 놓고 러프버러는 씨름했다. 영국인들은 종교에 흥미가 많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열악한 단체와 관계를 맺어 명망과 신분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모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이미 인정받고 있는 영국 국교회를 훨씬 더 지지했다.
러프버러는 또한 다른 교파 목회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천막 집회를 하는 동안 그는 지역 목회자들의 반대를 견뎌 내야 했다. 그들은 강단에서 그리고 집집을 방문해서 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려는 결정을 막았다.
이런 반대와 빈약한 인력에도 불구하고 러프버러는 인내하고 이겨 냈다. “하나님이 인내를 시험하고 계시며 그분을 통해 모든 일이 다 가능하게 될 것”4이라고 그는 믿었다. 주어진 과업에 대한 그의 인내와 굽히지 않는 헌신으로 영국의 사업은 결국 돌파구를 찾았다. 러프버러는 다른 선교사들에게 발판이 될 굳건한 초석을 마련했다.
1 John Loughborough, 『Rise and Progress of the Seventh-day Adventists』(Battle Creek, Mich.: General Conference Asso., 1892), p. 321.
2 Ibid.
3 Ibid., p. 322.
4 Nigel Barham, 『The Progress of the Seventh-day Adventist Church in Great Britain, 1878~1974』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Michigan, 1976), p. 63
리처드 데일리 목사이며 영국연합회 홍보부장이다.
존 러프버러(맨 왼쪽)와 부인 매기(바로 뒤)가 1882년, 영국 사우샘프턴 셜리로드의 레이번즈우드 선교센터에서 개최한 사역자 회의에 참석했다.
존 노튼 러프버러
인내와 굽히지 않는 헌신으로 영국의 사업은 결국 돌파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