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는 가장 위대한 아첨꾼이다.”*
악덕보다는 미덕에 대해서 타인의 증명과 확인이 더 필요하다. 성령의 일깨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만큼 자신이 철저히 정직하지 않았다고 자각할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진실의 대부분을 말하거나 진실의 거의 모두를 말하거나 혹은 자기 위신에 손상받지 않을 만큼의 진실을 말하며 살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자화자찬에 익숙하므로 양심이 어떻게 꼴 지어졌느냐에 따라 여전히 자신을 ‘정직하다’고 자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직하다’고 평가받으려면 나 아닌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와 목표를 들이밀어 줄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나의 ‘정직함’이란 결국 진실을 소중히 여기는 무리, 나의 행동을 줄곧 지켜보았으며 그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가득한 이의 집단이 내린 합의인 것이다. ‘윤리적’이라는 인증은 자기 자신이 부여하는 게 아니다.
사생활에서나 공석에서 무엇이 윤리적인 행동인지를 온전히 분간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표준을 깨닫고자 기도하는 이들의 모임인 신앙 공동체가 필요하다. 부드럽고 세련되게 서로의 책임감을 고취하는 교인들 사이에서는 진실하게 사는 습관, 남에게 유익을 끼치며 사는 습관이 행동으로 식별된다. 나 혼자라면 깨닫지 못할 것을 다른 신자들 덕분에 보게 된다. 그들 덕분에 하나님의 숭고한 요구 사항을 깨우치기도 하며, 자신이 거기에 못 미칠 때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점도 배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집단 양심의 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지도자로 선택받은 이들에게 특히나 필요하다. 그들의 결정이 곧바로 수많은 지역 교회의 영적인 건강과 안녕에 영향을 끼칠 때가 많다. 그들의 행동은 미래의 지도자들이 보고 배우는 선례가 되기도 한다.
윤리적인 행동을 높이 사는 교회란 지도자로 선택받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준에 책임을 느끼게 하는 교회이다. 또 지도자 중 누군가가 비윤리적 행동으로 사익을 취하거나 타인의 올바른 결정을 뭉개거나 자기 민족·인종의 이익을 꾀하면 반드시 그 결과가 따라야 하는 교회이다. 지도자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런 기대감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세상은 예수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이들의 삶을 주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높은 표준과 그렇게 살게 해 주는 은혜를 둘 다 강조하시는 주님의 특성이 그들의 삶에서 오롯이 구현되는지를 말이다.
우리 자신이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중시하고, 하나님과 겸손히 행하는 공동체로 신뢰받을 때만 성경의 진리를 전한다는 우리의 증언이 신뢰받을 것이다(미 6:8).
내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윤리적인 교회이다.
*François de La Rochefoucau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