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는가
교회가 되라
그리고 친절하게 살라
샤론 테니슨
몇 달 전 나는 영국의 트랜스-유럽지회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세인트 올번스 교회에서 네이선 스티클랜드 담임목사가 전하는 흥미진진한 설교를 들었다. 설교 제목은 ‘교회와 데이트하지 말라’였다. “데이트 상대를 고르는 사람은 상품을 찾는 고객과 같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런 접근 방식을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로 적합한 데이트 상대를 찾는 방식과 비교했다. 교회 생활을 데이트하듯 하려는 이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언제나 ‘이번에는 교회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를 궁리한다고 그는 말한다.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곳곳에 있는 신자들의 흩어진 공동체에 편지하면서 구약을 인용해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교회의 중심은 우리가 아니다. 교회의 중심에는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선”(골 1:17) 분에 대한 예배와 선포가 있다. 또 교회는 서로 격려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공동체이기도 한다. 우리는 격려를 받기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내가 누군가를 격려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고 자문해야 한다.
근본적인 전환
이제 우리는 교회의 개념을 ‘우리가 가는 곳’ 혹은 ‘출석하는 곳’ 그 이상으로 전환해야 할 때가 되었다. ‘교회는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라고 묻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택을 보류한 상태이므로 교회에 그저 기웃거리는 것일 뿐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연약한 죄인들이 예수님을 힘입어 온전해지는 공동체이므로 교회를 향한 열정과 헌신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진정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셈이다. 어떤 면에서 그런지 스티클랜드는 자신의 설교에서 세 가지 영역으로 강조했다.
첫째,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복된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할 때 우리 안에 좋은 일이 일어난다. 교회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는 기회를 놓친다. 예수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시지만(요 3:16)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도 맡은 분야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얼굴만 내비치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하다.
둘째, 그저 얼굴만 내비친다면 교회 공동체를 속이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제공해야 할 좋은 것들을 교회가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 모두가 요리사, 설교자, 음악가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봉사할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다.
셋째, 우리는 세상을 속이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일하고 계시며 우리가 그 일에 동참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복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동료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는다면, 우리가 성경을 펴서 동료 신자들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통해서 어떻게 세상에 희망이 주어지겠는가? 우리가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교회 밖에서도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1
사고방식의 변화
1년여 전, 사무실에서 우연히 『애드벤티스트 레코드』의 도발적인 제목을접하게 되었다. 마리차 브런트의 기사 ‘왜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가?’였다. 곧바로 잡지를 집어 들었다.2 마리차는 재림교인으로 성장하여 현재 재림교회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으며 목사의 아내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영적‧정서적‧정신적‧신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교회에 가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우울해지던 시절이 있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교회에 다녀 봐야 뭐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했다.” 그녀의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나쁜 태도라는 장벽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다음부터였다. 교회를 사방에 벽을 두른 건물로만 여기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동료 교인들의 기쁨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을 끼치도록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그녀는 기꺼이 교회에 가기를 원했다. 그녀 자신도 친절한 말과 포옹을 받으면서 복의 수혜자가 되었다.
교회는 단지 신학적 개념, 다시 말해 추상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교회는 숫자와 통계가 가득한 종이가 아니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침례 받은 새 신자 42%가 결국 교회를 떠난다.3 따라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제자로 양성해야 한다. 밀레니얼 세대들은 교회를 신뢰하며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고 젊은 교인인 마리차는 말했다.
친절하고 살아 있는 교회
교회에서 우리가 ‘얻는 게’ 무엇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 자신이 ‘교회가 되라’고 하나님은 호소하신다. 나는 트랜스-유럽지회 가정봉사부장 캐런 홀퍼드가 주도하는 새 프로젝트 ‘리브 카인드(친절하게 살라)’에서 영감을 얻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떻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지 유럽 각지 가정 사역 팀으로부터 수집한 31가지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그 프로젝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4 교회 사역에 참여하는 창조적인 방식들을 읽으면서 나는 메릴린 피터슨의 조용한 사역을 기억했다. 작고한 그녀는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운영 매니저인 멀 포이리어의 모친이다. 메릴린은 지난 10년간, 휠체어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집에만 있는 사람들, 자신의 교회 녹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 한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 그저 얼굴만 아는 사람들, 이사 온 새로운 교인들에게 카드를 보냈다. 모든 사람에게 카드를 썼다. 그녀는 답장을 받거나 어떤 소식을 들은 적이 거의 없다고 나의 동료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 사람들은 멀에게 카드를 보냈다. 그녀의 사랑과 보살핌에 감사해하던 사람들이 보낸 한 바구니의 카드를 멀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감화를 끼쳤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하늘에서 받을 상급에 우리 시선을 고정할 필요가 있다. “엄마는 그 카드를 보고 놀라워하실 거예요.”라고 멀은 말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외치는 일은 그저 설교를 하는 것만이 아니다. 교회에서 어떻게 친절을 베풀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실천해 보자. 십중팔구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친절한 행동 하나하나로 우리는 서로 가까워질 것이다. 연합과 보살핌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가족들이 지니는 특징이라고 예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요 17:20~21). 그러므로 친절하게 살자.
샤론 테니슨 『애드벤티스트 월드』의 배포·운송 코디네이터이다. 남편 맥과 함께 영국 세인트 올번스에 살고 있다.
1 www.youtube.com/watch?v=wcID-BxWJPw에서 설교를 들을 수 있다.
2 Maritza Brunt, “Why I Don’t Go to Church,” 『Adventist Record』, Feb.
16, 2018, p. 10, documents.adventistarchives.org/Periodicals/
AAR/AAR20180217-V123-03.pdf
3 Gerald A. Klingbeil, “They Still Leave,” 『Adventist World』 January
2019, p. 9
4 ted.adventist.org/images/Family/Kindness_at_church.pdf에서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