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해방 75주년과 재림교인
유대인을 보호한 재림교인,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재림교인이 있었다.
빅터 헐버트, 트랜스-유럽지회, 인터-유럽지회 스태프, 『애드벤티스트 월드』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의 진격으로 아우슈비츠가 해방된 지 75년이 지났다. 이제 생존자는 거의 없으며, 남은 생존자도 매년 사망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공포는 인류의 역사를 망가뜨리고 유럽에 큰 상처를 남겼다.
아우슈비츠의 역사 가운데는 유대인들을 숨겨 주거나 보호해 준 재림교인들이 있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도 있었다.
라트비아 리가에 있는 재림교회 본부를 방문하면 건물 밖 포장도로에 작은 표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는 이 청동판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을 숨겨 주거나 도왔던 용감한 시민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이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재림교인 자매가 살던 목재 건물의 밖에 또 하나의 청동판이 있다. 그들은 17세 유대인 소년을 데려와 목숨을 걸고 그 소년을 보호했다. 그 자매들의 친절로 이 소년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삭 클레이마니스는 재림교회 목사가 되었고 라트비아에서 가장 뛰어난 전도자로 활약했다.
헝가리에서는 라슬로 미츠흐너이 목사가 50여 교인과 함께 유대인들을 교회 건물에 숨겨 주고 그들의 탈출을 도왔다.
미츠흐너이 목사의 딸 머그더 베르젠츠제이는 나치 시대에 유대인을 도왔던 재림교인들을 언급하며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은 극소수였다.”고 회상했다. “그래요. 몇 사람이 있었어요. 하지만 더 있어야 했어요. 더 많이 그래야 했어요.”
미츠흐너이 목사는 유대인 구출을 위한 비밀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불린 그의 아내 욜란이 전적으로 그를 도왔다.
유대인 게토 근처 세켈리 베르탈란 거리에 있는 재림교회 건물이 구출 작전의 본거지였다. 이 겁 없는 목사는 건물의 작은 방, 복도, 지하실, 예배당, 계단 밑 그리고 강단 뒤에 많은 유대인을 숨겼다. 그는 재림교인 유대인과 다른 유대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도움을 구하는 모든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나치 수용소로서 무고한 6백만 생명을 앗아 간 대량 학살의 공포를 상징하는 곳이다. 재림교인들은 죽음의 수용소의 공포에도 굴하지 않았다.
트랜스-유럽지회 재림교회의 90년 역사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에서 라아팟 카말 지회장은 우리의 사명을 되새기게 하는 희망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는 폴란드 연합회장 리샤르트 얀코프스키 목사의 간증도 있다. 그는 자신의 가족 중 9명이 왜 아우슈비츠와 라벤스브뤼크에 투옥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안식일을 충성스럽게 지켰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그곳에서 죽었다. 얀코프스키 목사는 그들의 충성을 보고 자신이 가족들을 대신해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1월 27일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은 역사의 교훈 그 이상을 생각해야 하는 날이다. 최근의 르완다, 발칸반도, 로힝야 난민 등의 위기를 마주하며 역사가 또다시 되풀이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1945년 1월에 해방되기 전까지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의 수용소에서 10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그중 대부분이 유대인입니다. 과거의 교훈은 빨리 잊히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카말 목사는 말했다. “오늘날 새로운 모습으로 죄악과 증오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악에 대한 치료법은 재림교회의 사명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그분의 사랑스런 증인으로 살게 하고 만백성에게 재림을 준비하도록 세 천사의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홀로코스트의 공포는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습니다.”라고 트랜스-유럽지회의 오드리 안데르손 행정 총무가 말했다. “더구나 이제 이런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후세대들은 전쟁과 불화가 있는 곳에서 화해를 위해 일해야 할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