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눅 8:46).
동정심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 그날의 아침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매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치유를 소개한 책을 읽고 있었다. 예수님이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사회적·문화적 배경 그리고 소외된 자들을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대하시고, 필요한 것이 서로 다른 각 사람에게 귀 기울이시는 온유한 치유자에 대해 나는 즐겁게 빠져들었다.
그런데 군중 속에서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고 병이 나은 여자의 이야기에서 나는 잠시 멈추어 주석가의 예리한 통찰력에 집중했다.
“상처 받은 자를 치료하실 때 예수님은 대가를 치르신다.”고 저자는 말했다. “에너지가 빠져나갔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다.”
수많은 재림교인과 마찬가지로 나는 ‘동정심’을 지역 사회 봉사에서 했던 쉬운 일들로 여겼다. 우리는 지역 양로원에서 ‘선샤인 밴드’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웃에서 통조림을 모아 사회 안전망에서 제외된 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해마다 12월이면 집집을 찾아가 빙판길과 눈을 밟고 서서 ‘불우 이웃 돕기 성금’을 모으는 수확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따금 뼈가 시리게 추운 밤에 초인종을 울려야 하는 불편 말고는 교인들이나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거의 없었다. 우리는 ‘남는 것’, 즉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것이다. 그 시간이라는 것도 일하고 놀고 공부하는 일상의 스케줄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노인들과 외로운 이들, 비극과 상실로 아파하는 가족들, 동떨어져 지내는 빈곤과 전쟁의 희생자들에게 우리가 실천했던 동정심은 분명 복이 되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돌봄 비슷한 무언가를 했다는 훈훈함과 흐뭇함을 선사했다.
오래전의 그날 아침에 나는 남는 것을 주는 손쉬운 기부와 필요한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희생은 하늘과 땅 차이임을 깨달았다. 어느 복음 성가 가사처럼 어떻게 “힘 하나 안 드는 것을 드릴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은혜 안에서 나의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느릴 때가 많았고 교만이나 성급함에 방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보살핌과 시간을 선물하신 그리스도의 동정심을 값지게 보기 시작했다. 보살핌과 시간은 그분에게 대가를 요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럴 것이다. 또 나에게 자신의 시간과 사랑을 들여가면서 예수님의 동정을 실천하는 신실한 교우들이 소중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나는 구주이며 의사이신 주님의 얼굴을 보았고 친하게 지내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법도 배웠다.
다른 모든 덕목과 마찬가지로 동정심은 항상 ‘진행 중인 일’이다. 은혜 안에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의 보다 깊은 의미를 배운다. 목표가 더 선명해지고, 움켜쥔 손이 펴지고, 마음이 더욱 따뜻해진다. 지갑 그 이상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각자의 실험실에서, 이웃으로, 빈민 지역으로, 도시의 한 지역으로 그리고 판자촌으로 옮겨 가야 하는 친절과 자기희생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내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동정심이 넘치는 교회이다.
보살핌의 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