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들
어느 교회에 다니세요?
프레더릭 키마니
“어느 교회에 다니세요?”
작년 거의 내내 이 질문이 무서웠다. 여기에 진심으로 대답하려고 할 때마다 한결같이 돌아오는 반응 때문에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장소에 상관없이 직장 동료라든지 한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이라든지 학교 친구라든지 심지어 동네 이발소에서 만난 낯선 사람이라든지 할 거 없이 다 같은 반응이었다. 대답은 다 달랐지만, 반응은 다 같은 쪽이었다.
“왜 굳이 그 교회에 다니죠?”
“그 교인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글과 말이 돌아다니는데 왜 그들과 같은 신앙을 추구하고 있나요?
“그 교회에도 영성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정말 있나요?”
“재림교인들은 항상 믿음직하고, 진실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고 교리도 건전해서 언제나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내가 일하는 병원의 동료 의사가 던진 이 마지막 말이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언론에서 요즘 떠드는 일을 생각하면 저 질문에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TV고 신문이고 라디오고 할 거 없이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내분 이야기를 대서특필로 다루고 있었다. 말썽이 되는 문제를 놓고 속에 있는 말을 퍼붓는 교인들의 모습도 보도되었다.
일부 교인 사이의 분노와 냉소, 갈등을 대중 앞에서 다 보이게 된 마당에 어떻게 교회를 옹호하겠는가? 기본적인 기독교 설립 원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짓이 아닌가? 내 신앙과 교회를 옹호하고 충실하게 믿음을 전파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뉴스로 그 믿음이 더럽혀졌다면 더욱더 그렇다.
나는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재림교인을 ‘기이한’ 사람들로 여긴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뜻하는 ‘기이한’이 아닌 ‘특이한’ 사람 말이다). 재림교인은 콩을 좋아하고 일주일 중 일곱째 날에는 학교도 가지 않고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대부분 알려져 있다. 그런데 2020년 초인 지금 재림교회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러한 것들에 밀착되어 있었다.
‘어떤 교회에 다니고 싶니?’라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교회가 사랑과 관용으로 유명하다면 좋겠다. 재림교인으로서 나는 누구에게나 동정심 넘치는 사람으로 알려지고 싶다. 두려움, 편애, 편견 없이 누구라도 받아들이는 포용성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고 싶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소개된 성령의 열매 중 자비와 양선과 충성, 온유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성실과 충실과 아량과 따뜻함과 기쁨의 대명사로 알려지고 싶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 보자. 예수님이 만약 2020년에 살고 있는 재림교인이라면 어떻게 알려지기를 바라실까? 분명 2019년에 있었던 교인 간의 불미스러운 갈등으로 알려지기는 원치 않으실 것이다. 이보다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셨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한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사랑의 기별을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는가? 그 무엇보다도 이 땅에서 가장 사랑이 많은 기독교 종파로 알려져 있는가? 아니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교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고집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가?
내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동정심 넘치는 교회이다.
내가 다니고 싶은 교회는 모든 것의 중심에 사랑이 있는 교회이다.
프레더릭 키마니 케냐 나이로비에서 고문 의사로 근무하며 음악으로 하나님과 젊은이들을 연결하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