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고 싶은
용감한 교회
승자 독식
이야기의 결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인 공포물이다.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재앙에 대해 글을 쓰는 이 시간, 지금까지 보지 못한 코로나19로 세계에서 171,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평화의 때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적인 붕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현실은
코로나19가 기적같이 사라져서 모든 전문가의 예상이 빗나갈 수도 있다. 반면 자유세계의 규범이 공포의 폭정에 굴복할지도 모른다. 민주적으로 뽑힌 지도자들이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온순한 순응을 요구하는 법령을 공포한다. 기존의 사회적·공적 보건과 정치적·경제적 기반이 세계적인 규모로 흔들리고 위태롭게 된다. 중립국이나 중립적인 개인이 없는 전쟁, 승자도 없고 단지 생존자만 있는 전쟁으로 모든 피조물이 신음한다.
그런 재난은 지구에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참으로 우리는 숱한 문제와 함께 살고 있어서 만물이 “보시기에 아주 좋았더라”(창 1:31)는 완전히 경이로운 시작이 우리에게 낯설게 들린다.
아주 나쁘다
복이 충만한 태초의 “아주 좋았던” 때, 지구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창조주와 그분의 자녀들은 서늘한 저녁에 함께 거닐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그분과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분이 기다리면 그들은 갑자기 관목 사이에서 뛰어나와 젊음과 사랑이 넘치는 얼굴을 한 채 함께 “깜짝 놀랐죠!”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왜 기다릴 필요가 없는지 이미 알고 계셨다. 나뭇잎이 아니라 두려움이 그들을 가렸다. 그들은 우정을 망쳐 버렸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그들은 저지르고 말았다. ‘마음대로 먹어라. 단 먹는다면 너희를 죽일 특별한 나무 하나만을 빼고’라는 그분의 넉넉하고 은혜로운 명령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창 2:16~17).
그들이 느꼈을 황폐함을 알고 계셨지만, 자신이 여전히 그들과 교제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그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셨다. 그래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분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언제 부르시든지 그들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에덴의 상실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편협하다. 에덴의 비극은 사과를 먹을지 망고를 먹을지 선택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심히 좋았던’ 것보다 삶에 더 좋은 것이 있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지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무언가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창 3:16) 하다는 데 맞장구를 치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단순히 그런 생각을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이 나쁘게 변했다. 첫 눈물을 흘리거나 잎사귀가 마르거나 무고한 어린양을 도살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이른바 신의 노여움을 달래야 할 일이 생기기도 전부터 말이다. 하나님이 지상에 생명을 두시기 전부터 사탄은 그런 사고방식을 통해 하늘에서 시작한 전쟁에서 승리했다.
모두 나쁘다
이제 아담은 하나님 만나는 일이 즐겁지 않고 걱정스러웠다. 하와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달음박질하는 대신에 사랑의 낯을 피해 숨고 있었다. 뱀에게 동의한 탓에 인간은 가치 있는 모든 것 즉 자존감, 인격적인 신뢰, 달콤한 부부 관계, 서로를 이롭게 섬기는 자연 조화를 상실했다. 무엇보다도 우리 창조주 아버지와의 관계를 빼앗겼다. 그런 것을 빼앗는 것이 사탄의 싸움 방식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함으로 하나님을 괴롭혔다. 하늘에서 잉태되어 좌절로 마친 그 악은 이 땅에서 진척되었고 그는 이제 지구를 자신의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수치심도 겁도 없이 그는 자신에게 경배하면 자신의 지배권, “자신이 강탈한 권세”1를 주겠다고 예수에게 제안했다(마 4:8~9).
예수님이 왜 지상에 오셨는지 그는 알았다. 그가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심에 대항해 싸운 전쟁에서 하나님이 다음 단계에 착수하시는 것을 알았다. 지상의 전쟁 포로수용소에 자신이 몰아놓은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소리를 그는 들어왔다. 사탄은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들어서 사람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고 세상을 사탄의 관할 구역으로 버려두게”2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에 대한 자기 자신의 주장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우상 숭배를 통해 사탄은 오랜 시대 동안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게 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믿음을 곡해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3
어떻게? 자신들의 종교에 한 가지 관념 즉 “사람이 자기 행위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4고 하는 모든 거짓 종교에 주입된 원칙을 세운 것이다.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관념을 지니면 예수님은 정리 해고되고 만다. 그리고 예수를 약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탄에게 승리를 안겨 준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날부터 사탄은 예수님의 특권을 온당치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 그는 예수님을 경기장 밖으로 몰아내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더욱 힘썼다.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분은 결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다.
결과
사탄의 전략은 효과가 있었을까? 하나님은 인류를 포기하셨을까? 인간은 예수님을 정리 해고시켰을까? 사탄은 두 목적을 모두 이루는 데 근접했다. 1,500년 만에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항상 악할 뿐”(창 6:5)임을 하나님은 인정하셨다. 사탄이 승리했는가?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커졌는가?
또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 1:11). 퉁명스런 거절에 그분의 마음이 떠났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으므로 “세상을 멸망시키는 대신에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다.”5
그 싸움은 궁극적으로 악에 대항하는 사랑의 전쟁이었다. 무죄한 세계의 거주민들은 객관적으로 그리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지켜보았다. 사탄이 승리한다면 그들의 안전은 더 이상 보장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거절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짐승들의 틈바구니 외에는 그분이 태어날 곳이 없었다. 여우에게 굴이, 새에게 둥지가 있었지만 그분에게는 거할 곳이 없었다. 지친 머리를 둘 곳이 없었다(마 8:20). 자신들의 왕에게 그들은 왕관이 아니라 가시관을 씌웠다. 지상 너머의 지적 존재들은 인간이 실패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을 거친 나무에 벌거벗겨 못 박고 수치스럽게 높이 매달아서 죄가 극도의 절정에 이른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넋을 잃고 응시하고 있을 때, 그들은 지옥의 깊은 곳과 사랑의 다함이 없는 샘에서 북받쳐 나오는 한마디, 지옥문을 찢어 버리는 듯하고 온 우주가 완전한 평온에 들어가도록 뒤흔드는 외침인 “다 이루었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 지상권을 향한 수천 년의 싸움, 무한한 통치를 위한 쟁투, 우리의 마음을 얻으려는 싸움이 마쳐졌다.
이제 영원한 왕국, 권세, 영광이 그분의 것,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었다. 이제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단 7:27). 그렇다. 끝없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빌과 글로리아 게이더가 수천 번 노래했듯 만유의 주님께서 말이다.
다 이루었다. 싸움은 끝이 났다.
다 이루었다. 더 이상 전쟁은 없다.
다 이루었다. 전쟁은 끝났다.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주님이 되신다.6
1 『시대의 소망』, 129
2 앞의 책, 35
3 앞의 책
4 앞의 책
5 앞의 책, 37
6 www.lyricsfreak.com/b/bill+and+gloria+gaither/it+is+finished_20594567.htm
레이얼 시저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다.
발문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관념을 지니면 예수님은 정리 해고되고 만다. 그리고 예수를 약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탄에게 승리를 안겨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