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독제
빌 노트
코로나바이러스로 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수백만 명이 슬픔과 상실로 주저앉았고 세계 경제가 완전히 뒤집혔다. 행복하게 ‘지구촌’이라 부르던 곳에 불길이 번졌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세상은 훨씬 더 강력하면서도 은밀히 퍼지는 팬데믹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나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위용을 드러냈고 자연재해나 민족적·인종적 폭동, 난민이 발생하면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정치 선동가와 교활한 폭군의 거침없는 웅변과 함께 느닷없이 기세를 떨쳤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것이 지닌 전염성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고 추종자 세력을 끌어모았다.
아주 오래된 이 팬데믹은 다름 아닌 두려움 그 자체이다. 생김새가 다르고, 말이 다르고, 신념이 다른 이들에 대한 뼛속 깊은 의심인 것이다. 두려움이 발휘하는 근본적인 매력은 에덴의 타락만큼이나 오래됐으면서도 오늘날의 화두로 떠오를 만큼 현대적이다. 두려움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도 신뢰하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죄에 빠진 인간의 욕구를 채워 준다.
이것이 단지 성나고 이기적인 세상 사람들의 비극적인 이야기일 뿐이라면 종말이 임박한 세상의 또 한 가지 징조 정도로 보고 넘어가도 괜찮을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이 세상에 대해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즉 무정하고 무심하고 들썩거리고 자기중심적일 것이라고 예언하셨으니 말이다(마 24:12).
그러나 세상에 널리 퍼진 두려움이라는 감염병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 사이에도 둥지를 틀었고 여기에 대해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두려움은 종종 믿음 안에도 숨어 있다. 신뢰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배고픈 자, 노숙자, 전쟁으로 나앉은 자들에게 먹을 것과 거처를 제공하라는 복음의 외침은, 그렇게 하다가는 손해를 보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두려움 앞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바이러스 중의 지존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이것은 전염성이 있는 데다가 치명적이고 심지어 비대면임에도 퍼진다.
애석한 일이지만, 서로를 믿지 말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해서는 신경 끄라고 훈수를 두는 이들이 남은 교회 안에도 있다. ‘보수주의자는 상종하지도 말라’고 아니면 그 반대로 ‘자유주의자’ 혹은 ‘예배 방식이 다른 사람’, ‘낯선 곳에 사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개탄스런 종족주의와 비슷한 양상이 가슴 아프게도 우리 안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어린양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똑같이 그분을 따르지만 출발선이 다른 이들에게는 대립각을 세운다. 생각이 같고 언어가 같고 피부색과 출신지가 같은 이들끼리만 바싹 붙는다.
바야흐로 교회마다 아래 성경절을 큰 소리로 읽어야 할 때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사랑 넘치고, 애쓰고, 희생당하는 구주의 복음이야말로 언제나 두려움을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해독제이다. 이 진리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고 두려움 가득한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