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혁신적인 예수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19세기가 지나고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선교사이자 신학자인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다룬 고전적 저서에서 당시 종교 기득권층이 예수님을 “자기들 잣대로 바꾸어 놓았다.”고 고발했다.* 19세기 유럽의 가치와 문화는 신학자, 목사, 교회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만들어진 예수”는 알게 모르게 교회와 성당의 회중에게 꼭 들어맞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바라봄으로’ 변화되는 대신 ‘예수’를 상상의 산물로 바꿔 버렸다.
슈바이처의 고발은 예수님 시대의 종교 기득권층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십자가에 처형시켰다.
1세기 사람들은 구약을 낭독하는 일에 열중하고, 모세의 율법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간주하며 따르고, 자신들이 성경 예언의 중심에 있다고 이해했음에도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에 걸맞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예수님이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교정하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신학적 혁신
1세기 유대교의 모습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과 유사했다. 유대인의 나라는 종말에 대한 정서가 널리 퍼진 가운데 분열되고 양극화됐다. 고레스처럼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약속하신 인간 대리자를 하나님께서 임명해 주시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었다.
사두개인과 헤롯당은 당시 지배적인 정치·문화 제도에 타협했고 아슬아슬한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이교도 로마에서 구출하여 유대 민족 국가로 인도해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다. 열심당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군사적인 해결책을 찾았다. 부패한 종교에 좌절한 에세네파는 그들만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외딴 언덕으로 도피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순결 규칙을 준수하며 자신들의 거룩함과 의를 확인해 줄 ‘의의 교사’를 기다렸다. 각 무리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증거 구절을 인용해 메시아와 종말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했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관점을 피하셨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몰두하라고 권하셨다.
예수님의 첫 번째 혁신은 구약의 여러 가닥을 자신의 가르침과 사역에서 하나로 모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분 자신을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 자손 계보의 성취로 이해하셨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모세의 역할, 즉 자신의 보혈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는 자의 역할, 경건한 이들의 믿음을 살피고 새롭게 한 엘리사의 원형으로서의 역할, 다니엘의 환상에서 인자로 묘사된 종말적 심판자의 역할을 표방하셨다. (단 7장; 마 24장).
예수님을 묵살하려는 유대인들의 모든 노력은 당연히 초라한 실패로 돌아갔다. 국가적인 메시아의 통념에 반하여 예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은 기초적 언약을 인용하셨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이다(창 22:18; 마 1:1~14). 예수께서는 의인을 위한 메시아가 아닌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자신의 사명을 공유하셨다(막 2:17). 예수께서는 이 땅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보좌를 가리키셨다. 예수님의 사역이 성경에 기초했음에도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죄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성전
예수님의 첫 혁신은 논란이 될 수는 있어도 사형 선고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두 번째 혁신에 대해서는 신성 모독죄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고 심지어 물리적 구조를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면서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셨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 다시 말해 메시아적 인물은 왕, 제사장 혹은 하나님을 도와 그분의 백성을 위해 행동하는 이방의 군주일 수 있었다(사 45:1). 통상적으로 아무도 메시아가 신적인 존재일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인간 메시아 그 이상이라고 주장하셨다. 그분은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마 4:17; 16:16).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기별을 전하기 위해 그분 자신을 성전에 빗대거나 성전과 대조하셨다. 예수님을 재판하는 자리에서 대제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주장을 인정하는 말을 했다. 자신의 몸이 성전을 대체할 것이라고 예수가 말했다는 것이다(마 26:61). 유대인에게 이것은 신성 모독이었다. 성전은 그저 거룩한 곳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인류 가운데 개인적으로 거하시는 장소인 성전은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과 동의어였다. 성전에 대한 권위와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겨루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당시 신성한 시간인 안식일뿐 아니라 거룩한 만남의 장소도 마련하셨다. 최초의 ‘성전’은 에덴동산이었고 거기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니셨다. 그 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거룩한 식양에 따라 성소를 짓고 희생 예식을 추가하라고 명하시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회복을 상징하도록 하셨다. 솔로몬은 이 임시 성막을 장엄하고 경이로운 건축물로 변모시켜 하나님의 임재인 셰키나가 거하게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항구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도전장을 내미셨다. 첫째, 그분께서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으로 성전 구역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셨다(마 21:12~13). 둘째, 예수께서는 스스로가 십계명의 창시자인 듯, “내게 네게 이르노니”라는 그분 자신의 권위로 계명을 공표하셨다(마 5~7장). 셋째, 예수께서는 성전 예식을 거스르며 희생 제물 없이 죄인을 용서하셨다(막 2:1~11). 마지막으로 성전에 서 계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과 물리적 건물을 대조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예수께서는 십자가가 물리적 성전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라고 내다보셨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성전에 거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서지고 부활한 몸으로 성전의 기능을 완전히 대체하실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인류를 만나시고 그분의 보혈을 통해 모두를 죄에서 구원하신다.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정당하게 성전을 대체하셨다고 확언한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니신다. 그분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마 1:23).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회복시키셨다. 성전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마 27:51).
슈바이처의 평가는 오늘날의 신자들 역시 고발한다. 예수님의 정신적 이미지를 만들어 여기에 가치관, 인격적 특성, 신체적 특징을 연관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이 구주에 대해 지니고 있는 확신은 예수님의 초림 당시의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 우리의 개인적 문제와 바람을 반영한다. 그러나 실제의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이미지 그 이상이시며,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합친 것 그 이상이시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Albert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cess from Reimarus to Wrede』, trans. W. Montgomery, 2nd ed. (London: Adam and Charles Black, 1911), p. 397
아이케 뮐러 필리핀 카비테 실랑에 있는 재림교회 국제대학원의 신약학 부교수이자 신학대학원 부원장이다.
발문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에 걸맞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예수님이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교정하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포커스
혁신을 추구하는 탁월한 두뇌
혁신적으로 사고하라
우주에서 그 어떤 구조보다 복잡한 인간의 두뇌야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작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조 개가 넘는 세포와 펄떡거리는 뉴런 1,000억 개 이상이 작동하는 뇌는 순응성이 있으면서 자유 의지를 지향하며 은하계에 있는 수많은 별보다 훨씬 더 많은 연결을 활용하는 독보적인 예술 작품이다. 진정 “생각은 신체의 중심지이다.”1
이 놀라운 하나님의 작품은 이 시대의 두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한 놀라운 바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첫 번째 질문은 “뇌 과학은 혁신을 이끄는 정신 역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이며, 두 번째 질문은 “혁신적인 특성들은 특정 개인에게만 나타나는가?”이다.
다시 혁신 패러다임으로
세계는 4차 산업 혁명에 접어들었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기존 체계를 무너뜨리는 기술과 트렌드의 도입으로 생활, 작업, 관계의 방식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인류 역사의 엄청난 전환이 시작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생존을 위해 혁신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2 그렇다면 혁신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누가 이러한 혁신가가 되어야 할까?
혁신에 대한 수많은 정의 가운데 다음과 같은 포괄적인 정의가 도드라진다. “혁신이란 의미 있는 문제에 새로운 해결을 적용하여 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이다.”3 혁신의 실행은 종종 산업의 현주소를 뒤흔들어 온 파격적인 사상가들과 같은 특정 집단의 분야로 여겨졌다. 그 결과 혁신가들의 업적은 자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혁신적인 사고 그 자체, 즉 생각해 내고 창조한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본질적인 일에 대해서는 정작 관심이 별로 없었다.4
혁신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아야 할 뿐 아니라 혁신하는 방법도 터득해야만 한다. 물론 ‘기막힌 발상들’을 제시하는 데 탁월한 이들이 있지만 핵심은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혁신하는 법을 배우고 그 생각을 선교, 사업 운영, 생활 속의 문제 해결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의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흥미롭게도 두뇌 연구에 따르면 창의성은 혁신을 위한 로켓 연료이다. 일례로 일상적인 물건의 창의적인 용도를 제시하는 사람들의 뇌를 과학자들이 MRI로 정밀하게 검사했더니 가장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의 뇌에서는 여러 영역이 활발하게 움직였다.5
특히 브레인스토밍(기억, 상상, 감정, 자동적 사고)에 필수적인 뇌 영역들이 필수 자극을 선별하는 뇌 영역 및 인지·행동을 제어하는 전두엽과 연계해 활성화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같은 뇌 시스템 동조 활동의 발견으로 창의력이란 “뇌 전체의 노력”6이라는 점이 부각되었고, 창의적 사고에서 우뇌와 좌뇌의 영역이 분명하게 나뉜다는 보편적인 개념은 설득력을 잃었다. 따라서 각 영역 상호 간의 연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사람일수록 독창성이 뛰어난 성향을 보인다.7
상호 연계는 혁신을 일으키는 창의적 특성들이 깨어날수록 활발해진다. 그 특성들이란 호기심, 추상적 사고, 문제 해결(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등 거의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특성들이다. 사실 최근 연구에서는 창의적 사고 그 자체보다 앞서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영감’이라는 요소다.8 이 개념에서 핵심은 혁신이란 영감 있는 한 사람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아이디어를 개선하기 위해 새롭게 점증하는 통찰력을 제공하는 다수의 개인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9
따라서 개별적‧집단적 협력을 통해 우리는 혁신을 자아내는 창의력의 특성들에 불을 지필 수 있다. 사실 우리의 뇌는 평생 동안 변화한다. 신경 가소성이라는 이 특성은 우리의 배움에 끝이 없다는 일상의 단순한 관찰에 의해서도 명백하게 사실로 입증된다.
혁신가의 공구함에 담겨 있는 보석
그러면 우리는 혁신적인 특성을 개발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혁신적인 사고 개발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원천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그중 중요한 것이 많지만 내가 보기에 혁신가의 공구함에 담긴 가장 강력한 도구는 성경이다. 사실 뇌 과학에서는 신경 가소성이라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발견을 옹호하지만, 뇌의 변화하는 능력은 창조 이래 하나님의 설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지적한다(롬 12:2).
영감이 창의적 사고의 전구체이고, 창의적 사고가 기억·감정에 관련한 영역과 뇌의 인지 기능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의 혁신적 사고 과정을 깨우는 최적의 무대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지성을 강화하고 감정 깊숙한 곳을 흔들어 놓는 하나님의 말씀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창 1:27) 창조되었기에 그분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의 뇌가 변할 수 있고, 창조하고 혁신하는 능력을 깨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감동적인 진술을 남겼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간 지성은 가장 심오한 사상과 가장 드높은 열망의 소재를 발견한다.”10
1 『교회증언 3권』, 136
2 http://www.cipe.org/newsroom/innovation-as-a-necessity-for-survival/.
3 http://digintent.com/what-is-innovation/
4 V. Poirier et al., “Thoughts on Improving Innovation:what Are the Characteristics of Innovation and How Do We Cultivate Them?” 『Technology and Innovation』, vol. 18, pp. 319~330
5 Harvard University, “The Creative Brain Is Wired Differently,” 『ScienceDaily』, Jan. 17, 2018, retrieved from www.sciencedaily.com/releases/2018/01/180117163954.htm
6 E. B. Roger et al., “Robust Prediction of Individual Creativity Ability From Brain Functional Connectivity,”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2018); 201713532 DOI: 10.1073/pnas.1713532115.
7 Ibid.
8 Poirier.
9 Ibid.
10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52
대니얼 브루노(Ph.D.) 인지신경과학, 기술 혁신, 경험 디자인을 결합한 인간-컴퓨터 간 상호 작용 분야의 전문가이다. 『애드벤티스트 리뷰』 사역 크리에이티브 전략 담당이며 현재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아내 시에라와 최근에 태어난 딸 애들레이드와 함께 살고 있다.
포커스
리더십 혁신
새로운 상황을 위한 더 나은 해결책
샘 월터 포스의 풍자시 <송아지가 놓아준 길>에서는 목적 없이 방황하던 송아지가 남긴 구불구불한 발자취가 통로가 되고 오솔길이 되고 도로가 되고 거리가 되고 마침내 도시의 대로가 되는 과정을 전해 준다. 말하자면 조직들도 이와 같은 길을 따를 수 있다.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체계와 절차들은 일반적인 관행이 되며, 반복된 사용으로 조직의 문화에 침투하여 보호받는 지위를 획득한다.
어떤 조직에서든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변화된 환경에서 더 나은 해결책을 적용하려는 혁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명을 추구하고 보호하는 방편으로 체제와 구조를 보존하려는 것은 지도자에게 교묘한 유혹이 될 수 있다. 이런 조직은 효율이 떨어지고 결과도 신통치 않다. 조직과 체계는 필요하지만, 내외적 변화에 대응할 유연성을 충분히 갖춰야 한다.
그렇다면 지도자들은 어떻게 사명에 집중하면서 혁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재림교회의 역사에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1901년 시작한 조직 개편으로 복잡하고 무질서한 구조에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나 현재의 상황과 기술을 토대로 조직을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한다고 누군가 말해도 그리 놀랄 것은 없다.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이 글의 목적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혁신을 장려하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이다.
❶ 기회로 받아들이라. 조직 내의 위기는 분명 위협이 되며, 방어 조치가 긴급하게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열은 지속적이고도 유익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행동방식에 익숙해지려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늘 해 오던 방식’에 대해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조직과 개인은 일상 업무에 다른 방법들을 적용해야 했다. 회의 진행 방식이 바뀌었고, 광범위한 여행의 필요성이 재평가되고 급격히 줄었다. 권한의 분담을 재검토했고 어떤 문제는 해당 지역에서 즉시 해결해야 했다.
❷ 혁신을 모두의 과제로 삼으라. 조직의 고용인이나 구성원 모두가 현재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결책을 생각하도록 격려하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평가하는 길을 열어 두라. 실험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라. 중앙집권화,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마이크로매니징은 독창성과 혁신을 막아 버린다.
❸ 신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신규 채용인이나 신입 사원은 구세대가 당연하고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새로운 눈은 기관과 지역 교회의 일처리 방식에 뿌리 깊이 밴 인습을 더욱 명료하게 볼 수 있다. 그들의 질문과 관찰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설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라는 결과를 위해 대안을 찾아보게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❹ 새로운 기술 트렌드를 지속적으로 인지하라. 최근의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 보고에서는 “전 세계 노동 시장에서 지불되고 있는 활동의 절반이 현재 입증된 기술의 적용에 따라 잠재적으로 자동화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지우개를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적이 언제인가? 공중전화는? 종이 지도는 또 어떤가? 시대가 바뀌었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오늘날 관리자나 교회 지도자들은 조직의 수명과 사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트렌드에 대한 정보를 계속 얻어야 한다. 변화무쌍한 테크놀러지의 최첨단이 될 필요는 없지만, 지금은 21세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❺ “성령이 교회에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계 3:22). 영적인 측면과 관련해 또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명에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대해 새롭게 배울 것이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예수께서는 약속하셨다(요 16:13). 신약 사도행전을 보면 초기 신자들이 영적 생활에서 새로운 시각과 행동으로 혁신을 이루도록 성령께서 이끄신 과정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다. 사도행전 전반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끄는 참된 단계를 제시한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1) 사도행전 2장 1~12절: 성령께서 모인 무리에게 임하셨고 모두가 놀라워했다. (2) 사도행전 8장 1, 4절: 예루살렘의 박해로 신자들이 흩어졌고 새로운 지역에서 선교가 시작됐다. (3) 사도행전 9장: 사울의 회심과 사역은 테러리스트가 복음 전도자가 된 사건이다. (4) 사도행전 10장: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났고 민족 중심주의와 편견에 맞섰다. (5) 사도행전 11장 19~23절: 안디옥 교회는 지도자 없이 평신도 주도로 생겼다. (6) 사도행전 15장 1~29절: 신학적 이해와 교리에 새 지평을 열었다.
성령께서는 초대 교회 선교 활동의 지도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셨다. 그분께서는 신자들의 인식과 기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경험을 통해 그들을 이끄셨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을 더 새롭게, 더 깊게 그리고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성령님은 성경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그와 반대로 성경에 이미 수용되었고 예언된 진리를 더 명확하고 포괄적으로 깨닫게 하셨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전제를 바로잡아 개인과 교회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면서 죄를 일깨우시고, 우리의 마음이 혁신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 하나님의 마음과 조화를 이루게 하신다.
*www.mckinsey.com/featured-insights/digital-disruption/harnessing-automation-for-a-future-that-works, accessed June 7, 2020
로웰 쿠퍼 대총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워싱턴 케너윅에서 아내 레이와 함께 살고 있다.
성령께서는 초대 교회를 위해 지속적으로 선교 지도를 업데이트하셨다.
사이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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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인 혁신가
레너드 리 베일리(1942~2019)
미국
유명해진 이유: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에게 원숭이의 심장을 이식했다.
레너드 베일리는 유아의 종(種) 간 심장 이식의 개척자이다. 그의 노력을 토대로 심장 이식 수술의 분야에서 갖가지 혁신이 일어났다. 베일리는 로마린다 대학병원에서 42년간 일했다.*
*lluh.org/leonard-bailey
재림교인 혁신가
마거릿 카로(1848~1938)
뉴질랜드
유명해진 이유: 뉴질랜드 치과 의사 인명부에 등재된 최초의 여성. 188년에 A. G. 대니얼스의 연속 집회에 참여한 뒤 재림교인이 되었다.
마거릿 카로(니 말콤)는 1848년 12월, 뉴질랜드 리치먼드에서 태어났다. 외과 의사인 남편과 함께 가난한 광산촌에서 의료 활동을 펼쳤다. 뉴질랜드 치과 의사 인명부에 등재된 최초의 여성이며 건강 기별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카로는 학대받는 여인과 어린이를 위해 1898년에 베다니 자립원을 세웠다.*
*teara.govt.nz/en/biographies/2c8/caro-margaret
14
재림교인 혁신가
장 누스바움(1888~1967)
스위스
유명해진 이유: 국제 종교자유보호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Defense of Religious Liberty)를 창설했다.
의사인 누스바움은 1933년에 남유럽지회 종교자유부장으로 선출됐다. 여러 곳을 순회하며 개신교, 정교회, 기타 그리스도인들을 대변했다.*
*aidlr.org/history.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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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인 혁신가
애나 나이트(1874~1972)
미국
유명해진 이유: 국제 유색인종교사협회를 창설했다.
재림교회 내에서 애나 나이트는 인도 선교사로 유명하다. 교육자, 간호사이자 국제 유색인종교사협회(National Colored Teachers Association, NCTA)의 창설자이다. 앨라배마 헌츠빌에 있는 오크우드대학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NCTA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장학 사업, 학교 설립, 시설 확충, 불우 학생 후원에 전념했다.*
*ahu.edu/blog/mission-ministries/black-history-month-anna-knight
재림교인 혁신가
요한 헨드릭 베이드너르 2세(1912~1994)
네덜란드
유명해진 이유: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나치의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하 연락망을 운영했다.
재림교회 목사의 아들인 요한 베이드너르(장 헨리로 불리기도 한다.)는 네덜란드 수출입 업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신앙으로 박해당하는 이들을 위해 지하 탈출 조직을 운영, 스페인이나 스위스로 탈출하도록 도왔다. 이 사건으로 붙잡혀 독일 노동 수용소로 이송되던 도중 거의 죽기 직전에 탈출했다. 1950년에 미국으로 이민했다.*
*encyclopedia.ushmm.org/content/en/id-card/ dr-johan-hendrik-weid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