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우리
도움을 줄 때도 있고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다.
자동차를 몰고 슈퍼마켓을 지나가면서 보니 나이 든 어느 여성이 식료품을 잔뜩 들고 힘겹게 오솔길로 향하고 있었다. 교차로에 빨간 신호등이 켜져 차를 세웠는데 그 여인이 길 옆 덤불 속으로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라 급히 차를 주차한 뒤 혹시나 도움이 필요할까 싶어 달려갔다.
가까이 갔더니 찢어진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고 그 여인은 도로 경계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괜찮으세요?”라는 내 질문은 분명 상황에 맞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걸까? 자세히 살펴보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지도 않았다. “도와드릴까요?”
이번에 들은 대답은 분명히 영어였지만 작은 목소리에 발음도 불분명했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뇌졸중 환자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 그녀의 어깨에 내 손을 얹어 흔들리는 몸을 붙들고 구급차를 불러도 되는지 물었다.
내 말에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여인은 고개를 돌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풍기는 냄새로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날숨에 묻어 나오는 알코올 냄새로 미루어 그녀는 당뇨병성 케톤산증을 앓고 있는지도 몰랐다. “혹시 술을 드셨나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의 내 판단이 얼마나 잘못되었던가! 그녀는 병약한 노인이 아니었다. 그저 술을 마셔서 보도조차 제대로 걷지 못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아무 탈 없이 지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길가 배수로에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 위험했다. 경찰을 불러 이 상황을 처리하라고 해야 하나? 아마 가장 쉬우면서 가장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옳은 일 같지는 않았다.
그 여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 차에 돌아가 찢어진 쇼핑백을 대신할 가방을 찾았다. 냉동 치즈케이크, 우유 한 통, 과자, 인스턴트식품 몇 가지를 주워 담으면서 그녀에 대해 아무런 평가도 내리지 않기란 참 힘들었다. 분명 최선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뒤처리를 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살고 있으며 주소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식료품이 든 가방을 집까지 들어다 주어도 되는지 물었고, 그렇게 나는 도움 없이 걸을 수 없는 그 여자의 손을 잡고 마을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교인들이 이 모습을 보면 과연 뭐라고 생각할까 싶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샤론*이라고 알아듣기까지 여러 번 귀를 기울여야 했다. 섀넌, 수전 혹은 발음이 불분명한 레베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샤론이라고 들은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그 여인은 분명하고 비통한 어조로 자기 사연을 말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아마도 그녀가 술을 마실 때마다 했던 공공연한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 변명이 통했다. 그 여인은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고 상실의 아픔을 겪은, 이름을 가진 나와 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넘겨짚지 않기
그녀와 어색한 포옹을 나누었고, 그동안 만났던 사람 중 최고라는 찬사를 들은 뒤에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내 차로 돌아왔다. 샤론의 삶은 내게 정말로 낯설었기에 어쩌다가 늦은 아침에 냉동 치즈케이크, 우유, 과자를 들고 술에 취한 채 집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 우여곡절을 나는 도무지 상상해 낼 수 없었다.
우리는 자신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연스레 ‘우리’가 아닌 ‘그들’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건강 기별을 따르고 성경의 예언을 이해하고 온전한 정신으로 편안하게 중산층의 삶을 즐기는 우리보다 ‘그들’은 왠지 가치가 덜한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인간성과 맞닥뜨리면 우리는 날을 세운다. 나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애정, 상실감, 슬픔, 기쁨을 느낀다. 성경에 나타난 준엄한 평등에서 우리는 이 점을 깨닫는다.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여기려 할 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2~23). 사실 성경 역사는 이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믿음의 영웅들을 기념한다. 하지만 노아는 술을 과하게 마셨다(창 9:21). 솔로몬은 “어떻게 하여야…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라고 말한다(전 2:3). 그들 모두 부족한 사람이었다.
현실은 적어도 4차원이며, 성경은 인간을 일차원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범주로 가르는 사고 체계를 무너뜨린다.
성경의 도입부에서는 우리 조상이 아담과 하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나타낸다. 우리처럼 그들도 부족한 사람들이었고 모든 인류는 이 부부를 통해 연결된다.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를 열거하면서 마지막으로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눅 3:38, 쉬운)이라고 지적한 것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아담에게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아버지가 계셨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에게서 인류를 분리시켰을지 모르나,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해 주셨다(요일 3:1).
10월 넷째 안식일인 창조 안식일에, 성경의 창조를 다시 음미해 보면 어떨까? 혹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동료 인간, 동료 교인을 우리는 성경적이지 않은 잣대로 판단하면서 말만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창조는 논리적으로 우리를 급격하면서도 겸손한 평등주의로 이끌어 준다.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이웃, 우리가 경멸하는 그들의 조상, 중독에 빠진 노숙자들, 살아남기 위해 절망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난민들, 사형 선고를 받은 모든 살인자까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처럼 가치 있게 여기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주셨다. 우리와 ‘그들’이 아닌 우리와 우리를 말이다.
모든 사람은 누가 되었든, 무엇을 했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창조주에게 똑같은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마 5:45). 창조 안식일은 특히 샤론처럼 희망과 사랑에 목마른 다른 이웃들에게 이 은혜의 복음을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전하는 날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티모시 G. 스탠디시(Ph.D.) 대총회 지구과학연구소의 생물학자이자 수석과학자이다.
발문
성경의 창조를 다시 음미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