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종종 간과되는 성경적 종말론에 관한 사실
그림도 멋지고 성경 구절도 훌륭하게 각색한 성경 만화 시리즈를 어릴 때 즐겨 보았다. 이 만화에서는 신약 성경의 다양한 이야기를 재현해 냈다.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아이들과 함께 가끔 이 만화를 본다.
그 시리즈의 이야기 중 하나가 유명한 열 처녀의 비유이다(마 25:1~13). 이야기 마지막에서 신랑이 미련한 처녀들에게 건네는 대답은 여러 면에서 성경 본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러분이 나의 친구라면 내가 온다고 했을 때 왜 맞으러 나오지 않았나요?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여러분을 알지 못합니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마태복음 25장 11~12절 그리스어 본문의 언어적 뉘앙스, 특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를 짧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세밀한 표현
예수님의 비유에 묘사된 장면에는 엄숙한 의식이 도드라진다. 원문에서 과거의 상황을 현재 시제로 표현한 데서 이 점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이 언어적 특징을 ‘역사적 현재’라고 부른다.1 시제에 변화를 주어 장면에 현장감을 더하는 기법이다. 독자들은 그러한 강조성을 인지하면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더욱 흥미를 기울인다.
또 11절에는 신랑의 도착을 놓친 다섯 처녀가 탄원하는 말에 ‘주님’이라는 단어가 두 번 언급되어 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절의 시작 부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러나 그가 대답하여 이로되”이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방식이다. 고전 그리스어나 헬레니즘 그리스어의 전형적 형태를 따른 것이 아니다. 신랑의 대답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하지만” 또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엄숙한 격식을 취하고 뒤이어 그리스어 동사 ‘오이다(알다)’가 따라붙는데 문맥상 신랑과 어리석은 다섯 처녀 사이에 의미심장한 유대가 없음을 나타낸다.2 이 동사는 신랑이 느낄 듯한 당혹감을 강조한다.
어조를 파악하라
현대어로 옮겨 놓은 성경 역본 대부분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로 되어 있는데 이 번역은 적절한 것 같다. 하지만 간혹 그렇듯이 이 번역은 원문의 강렬한 어조를 완전히 표현해 내진 못한다.
일부 현대 번역본은 유용한 대안을 제시한다. 앰플리파이드 바이블(The Amplified Bible)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우리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라고 번역했다.
패션 성경(The Passion Translation) 같은 최신 번역도 이와 유사하다. “내가 당신들을 아느냐고요? 단언컨대 여러분을 알지도 못합니다!” 둘 다 마태복음 25장 12절의 그리스어 원문의 강조 표현을 더 잘 나타낸다.
이 비유에 관한 엘렌 화잇의 설명은 그리스어 구절에 포함된 강한 표현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연구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쳐다보고 살 줄도 모른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친밀히 사귀지 못했으므로 하늘나라의 언어를 알지 못하며 하늘의 기쁨도 알지 못한다.”3 같은 장 후반에 화잇은 이렇게 덧붙인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사는데 하늘에서 그분과 잘 어울려 살 수는 없다.”4
따라서 신랑이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고집스럽게 무심하거나 캄캄한 밤이라 잃어버린 처녀들을 알아보지 못해서가 아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라 스스로 내린 결정의 책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사자들이다. 그들 자신이 불운한 현실을 설계한 당사자들이다. 잔치의 핵심인 분과 친밀하고 소중한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 만화에서는 혼인 잔치에 참석할 정도로 신랑과 친밀한 유대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반박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다. “만약 당신들이 제 친구라면 제가 알렸을 때 왜 오지 않았나요? …저는 여러분을 알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예언적 무관심과 마지막 날의 혼란 사이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과 유대가 깊어져야 한다. 마태복음 25장 12절에서는 우리가 반드시 매일 예수님과 동행해야만 하며 영원히 그래야 한다는 중요성을 상기시켜 준다.
1 마태복음의 ‘역사적 현재’ 기법은 이야기의 핵심 순간을 가리킨다고 논증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음 서적을 참고할 것. S. Wolfgang, “Das Präsens Historicum als makrosyntaktisches Gliederungssignal im Matthäusevangelium,” New Testament Studies 22.4 (1976): 475
2 참고 W. Bauer, W. F. Arndt, F. W. Gingrich, and F. W. Danker,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hird ed.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2000), p. 693
3 엘렌 G. 화잇, 『실물교훈』, 411~412
4 앞의 책, 413
레안드로 J. 벨라르도 플라타 재림교회 대학 신학부의 신약학 교수이다. 아르헨티나 엔트레리오스주 리베르타도르 산마르틴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발문
미련한 처녀들은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라 스스로 내린 결정의 책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사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