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생일
은혜, 감사 그리고 새로운 시작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 처음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갑자기, 그 즉시, 말 한마디 꺼내기도 전에 우리에게 관심을 보일 때가 있다.”1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행동을 보고 나서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감동을 느꼈다. 문벌 좋은 유대인 지도자이자 명예로운 산헤드린 회원이며 존경받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많은 유대인처럼 그 역시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니고데모의 성경 지식은 깊었다. 그는 ‘토라’, 말하자면 율법의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대화
요한은 요한복음 3장 1~21절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만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니고데모는 어둠을 틈타 나사렛 출신의 젊은 랍비를 찾았다. 그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지만 아직 확신은 서지 않았다. 분명 그는 첫마디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니고데모는 예의 바르고 공손했다. ‘랍비’는 ‘나의 주인, 나의 선생님’을 뜻하며 영적 지도자에 대한 적절한 호칭이었다. 사실 그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예수님의 표적과 기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말미암았음을 자각하면서도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라고 칭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칭호나 미사여구 때문에 곁길로 새지 않으신다. 그분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니고데모가 표적 ‘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묘사하면서 사용한 동사(두나타이)를 예수님이 그대로 사용하신다. 똑같은 동사에 부정어(우)를 붙여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니고데모는 ‘행하는’ 것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훌륭한 바리새인이었던 그는 율법을 ‘행하는(지키는)’ 일에 전념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난다는 것 혹은 다른 역본에서처럼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새로운 탄생이라는 것이 니고데모에게 완전히 낯설지는 않았다. 유대교에서는 새로운 회심자들의 경험을 말할 때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대답이 니고데모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엘렌 화잇의 진술에 따르면 “니고데모는 자기는 변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놀랐던 것이다. 그 비유를 다름 아닌 자신에게 적용한 것에 그는 기분이 상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정직한 갈망과 바리새인의 교만이 싸우고 있었다.”2
예수님의 첫 말씀에 대한 니고데모의 반응에 이런 불만이 암묵적으로 나타난다. ‘저처럼 늙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니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예언과 신학에 대한 이야기나 나누시자고요.’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이나 신학에 대해 말씀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니고데모에 대해 그리고 그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셨다(5절).
니고데모의 반응에 공감이 갈 것이다. 위로받고 싶어서 모처럼 용기를 내어 찾아갔는데 도리어 궁지로 몰린다면 특히 그렇게 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면 언짢을 수밖에 없다.
니고데모는 뒤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이 새로운 시작에 대해 말씀하시는 동안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여러 질문을 던지고(9절) 주의를 기울인다.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을 예수께서 사례로 소개하실 때, 그는 눈이 뜨이기 시작한다. 그날 밤 예수님과 헤어진 다음에 그는 계속해서 탐구하기로 했다.
결심
복음 전도자들이나 실천신학 교수들은 결심시키는 기술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예수께서는 특정한 사람의 상황과 필요에 맞게 다가가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하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고(마 4:19; 8:22 등)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질문을 남기셨다. 성경에는 그분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어떻게 끝내셨는지에 대한 결론을 소개하지 않지만 엘렌 화잇은 이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 준다. “심령이 깨우침 받는 것은 논쟁이나 토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쳐다보고 살아야 한다. 니고데모는 그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돌아갔다. 그는 성경을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하였으니 곧 이론을 변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하여 연구하였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복종시켰을 때 하늘 왕국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3
시간이 갈수록 니고데모의 결심은 확실해졌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해당하므로 그의 존재감은 요한복음 7장 50~52절의 짤막한 언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성경 기자들에게 주목받지 못한다. 바로 니고데모가 동료 지도자들에게 성경 율법에 따르면 적절한 심리와 재판 없이 예수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다. 동료 지도자들은 그의 진술에 대해 ‘좋아요’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개의치 않았다. 그 뒤 성경 이야기에서 그가 다시 등장하는 대목은 요한복음 19장 39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에 쓰일 값비싼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제자들 대부분이 달아난 마지막 순간에 니고데모는 분연히 일어나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선언한다. 메시아를 진정으로 찾았던 한 사람과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주었던 나사렛 출신의 온유한 치유자께서 얻은 또 하나의 결실인 것이다.
새로운 시작
우리가 구주를 어디서 만나든,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든, 캄캄한 밤중이든, 함께 예배드리는 가정에서든, 수학이나 역사를 공부하는 교실에서든, 그분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밀어붙이거나 조종하지 않으신다. 그저 초청하실 뿐이다.
그분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자각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찬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새로운 탄생이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이 선물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싶어 진다. 이 세상에 복을 전할 준비가 된다. 그분께서 이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다는 벅찬 감동이 차오른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문화와 국가를 바꾸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지역 교회 안식일학교 교사, 집사, 음악 봉사자, 장로로 꾸준히 헌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우리 모두에게 이것은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는, 그분의 창조 능력을 매일 상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다.
1 Online at www.goodreads.com/quotes/92639-we-sometimes-encounter-people-even-perfect-strangers-who-begin-to
2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171
3 앞의 책,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