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진리를 전한다’
이 말의 뜻은?
기독교인 대부분은 사랑의 자세로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영역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흔쾌히 생각하면서도 어떤 대화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마치 도덕성에 대해 선택적 기억상실증을 겪는 듯하다. 도덕성을 강조하면서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상대할 때는 도덕성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우리에게 사랑 안에서 인내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잊어버리지는 않지만, 마음 어두운 곳에서 사랑을 끌어내 대화에 임해야 한다는 생각은 잊어버린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다. 예수님의 권고를 유념하면서 사랑의 의사소통을 위한 여섯 가지 원칙을 생각해 보자.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으라
의견이 다른 사람과 무엇에 대해서든 건설적이고 유익한 토론을 나누고 싶다면, 공통분모를 찾아야만 한다. 자신이 이해받는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마음을 터놓고 비평을 받아들인다.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합의점을 찾아간다면 성공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는지 이미 알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지도 명심하자.
대답할 태세가 아니라 이해하려는 자세로 들으라
경청의 중요성은 모두 알고 있지만,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경청이란 내가 말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진짜 듣는다는 것은 입을 다물고, 방해하고 싶은 충동을 참고, 상대방이 실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면 상대방의 관점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 상대방 또한 나의 말을 더 기꺼이 들으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대응하지 않는 편이
논란거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종종 우리의 의견을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장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될 때 배우려는 마음이 가장 크게 생기며, 자기 말을 가장 잘 경청하는 이가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른 누군가가 자기 의견을 말하게 놔두고 우리의 의견은 다음 기회에 말하는 편이 가장 좋을 때도 있다.
무례하거나 빈정대거나 논쟁적이지 않게
우리는 친절과 예의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맞받아치고 무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저술가 밥 고프의 말처럼 “아무도 논쟁으로 상대방을 감동시킨 적은 없다.” 대화가 논쟁적으로 변하거나 누군가의 이상이나 가치를 무시하며 놀리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의견으로 상대방을 설득할 기회는 급격히 줄어든다.
온라인 대화는 특히 너그럽게
온라인에서 의사소통을 할 때는 짓궂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자기 글을 올릴 때나 남의 글을 해석할 때 넓은 도량을 품어야 한다. 인터넷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라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친절하고 이해심 있게 소통하자.
겸손하게, 공감하는 태도로
내가 다녔던 학교의 버스 기사는 예배 설교에서 “우리가 옳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가장 많이 죄를 짓는다.”라고 말했다. 남들과 이야기하면서 겸손해야 한다. 틀릴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우상을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잔혹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틀림없다는 생각에서 비롯하는 우상을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누군가 틀렸더라도(절대 진리는 존재하므로) 그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이 순수한 동기에서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들에게 망신을 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랑으로 인내하자.
아넬리제 왈먼 ‘라이트베어러’에서 활동하는 창작가이다.